본명 김창수, 金九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을미사변 때 일인에게 시해당한 명성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사형에 이르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3ㆍ1 운동 후 상해로 망명,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8ㆍ15 해방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 섰고,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1949년 육군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당해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며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火釜)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며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구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이나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럽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안매산(安梅山) 명근 형이 꿂어 주기기를 결심하고 조용히 묻거늘 나는 찬성하였다. 그가 3~4일 동안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하는 핑계로 음식을 끊었으나, 눈치 빠른 왜놈 간수가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진찰케 하고 매산을 결박한 후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을 풀어넣었다. 결국 매산이 "자살을 단념하겠노라"고 통보를 한 것을 보면,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데 되었도다.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는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으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를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 반기문

오늘의 책 2015. 1. 13. 04:0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지난주와 이번주는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현 UN사무총장이신 반기문 총장의 어렸을 때부터의 일대기를 쓴 책이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났으며, 중학교 때는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케네디 대통령도 만나고 온다. '케네디'대통령을 만나면서 그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외교관'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기문 총장님은 어렸을 때 공부를 그렇게 잘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뭐... 내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중1인 나는 개같은 점수를 받아온다;;;. 난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구절을 쓰겠다.

 

 

운동은 잼병, 공부에는 욕심쟁이

기문은 6학년 때 같은 반에 한승수라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기문과 승수는 주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주산  대회를 앞두고 기문은 한승수를 붙잡고 누가 주산을 더 빨리 하는기 겨뤄보자고 했다. 반기문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주판으로 셈하는 주산을 장려했다. 산수 시간에 주산을 따로 가르치고 주산대회도 종종 있었다. 승수는 기문의 말에 주판을 꺼내 따라락 하고 줄을 맞췄다. 심판을 맡은 친구 하나가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35 곱하기 24에 541을 빼고 7,832를 더하고 다시 81을 빼면?"

"8,050."

승수가 먼저 외쳤다. 몇 번 더 했지만 승수 녀석이 언제나 더 빨랐다. 먼저 내기를 건 반기문은 머쓱했다. 그런데도 다음날 또 다시 승수에게 겨루자고 했다.

그 이후로 둘의 주산 시합은 매일 이루어졌다. 시합을 하면서 기문의 주산 실력은 자꾸 좋아졌다. 결국 승수가 손을 들고 말았다. 기문은 결국 학교 대표로 주산대회에 나가게 됐다.

 

나는 반기문 사무총장님이 멋지다. 내가 쓴 구절에는 안나오는데, 그 분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셨는데 당당히 수도권 학생들을 이기고 미국 연수 티켓을 잡으셨다. 그리고 당시 가난했는데 공부를 그렇게 잘하시다니 놀랍다. 나는 오늘 내가 쓴 운동은 잼병, 공부에는 욕심쟁이 구절이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내가 운동은 욕심쟁이인데, 공부에는 잼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잘하지는 못한다. 나도 꿈이 외교관에 들어간다. 내 꿈은 내가 축구를 좋아해서 FIFA(세계축구연맹)직원이다. 그러려면 나도 영어를 잘해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한다. 뭐... 난 머리가 굉장히 에디슨보다 똑똑하기 때문에 식은죽먹기다 (자랑질 죄송ㅋ). 앞으로 책도 꾸준히 읽고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들어야겠다.

홍성욱 / 교회만이 희망이다

오늘의 책 2014. 12. 29. 14:57 Posted by 따시쿵

홍성욱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고등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Th. B),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육군 군목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에서 선교신학으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2006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환 교수(Visiting Scholar)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신학도를 위한 선교학 교재로 《선교학 개론》, 《선교와 디아코니아》, 《선교와 교회 성장》을 공저하였다. 또한 선교적 교회와 일꾼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교회만이 희망이다》, 선교적 교회를 향한 열망을 담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저술하였다. 이밖에도 신학생을 위한 선교학 교재 『선교학 개론』, 『선교와 교회성장』, 『선교와 디아코니아』를 공저했다. 영문 저서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of the Concept of God in Korea>을 영국 Regnum 출판사에서 《Naming God in Korea : The Case of Protestant Christianity》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현재는 안양제일교회 담임목사, 아시아빈곤선교센터(C.A.M.P....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고등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Th. B),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육군 군목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에서 선교신학으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2006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환 교수(Visiting Scholar)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신학도를 위한 선교학 교재로 《선교학 개론》, 《선교와 디아코니아》, 《선교와 교회 성장》을 공저하였다. 또한 선교적 교회와 일꾼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교회만이 희망이다》, 선교적 교회를 향한 열망을 담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저술하였다. 이밖에도 신학생을 위한 선교학 교재 『선교학 개론』, 『선교와 교회성장』, 『선교와 디아코니아』를 공저했다. 영문 저서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of the Concept of God in Korea>을 영국 Regnum 출판사에서 《Naming God in Korea : The Case of Protestant Christianity》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현재는 안양제일교회 담임목사, 아시아빈곤선교센터(C.A.M.P.) 이사장, WEC KOREA 이사장, 교회성장연구소 법인이사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종이 쓰임 받는다


창세기 24장은 몇 가지 면에서 특이한 장이다. 첫째, 창세기의 50개 장 중에서 절이 가장 길다. 일반적으로 한 장이 30절 내외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창세기 24장은 67절까지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창세기 24장의 사건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록되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격이 일반적으로 인명을 상세히 기록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인공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이례적이다. 셋째, 창세기 24장의 사건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의 신분이 늙은 종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은 19세기에 있었던 사건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팔백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종의 위치는 짐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하찮은 종이 성경 한 장의 주인공이라니 특이한 일이다.


무엇이 이런 이례적 사건을 어용한 것일까? 무엇이 하나의 이야기를 67절까지 이어지게 했으며, 왜 늙은 종이 사건을 주도케 하고, 또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비중을 두어 전개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종의 위대함에 있다.


창세기 24장은 나이가 많아 죽음을 앞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택하기 위해 고심하며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꼭 자신의 고향에서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그는 고향까지의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하자 그 일을 늙은 종에게 위임했다. 어떤 기존도 제시하지 않고 늙은 종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종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과 그분이 신뢰하시는 종의 관계를 본다. 창세기 24장의 늙은 종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의 모범을 본다. 이 종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게서 기뻐하시는 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사람의 주변에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종은 사명 최우선 자세로 나타난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에게는 3H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Head, 둘째는 Heart, 셋째는 Hands 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있고 열정이 있는 실천의 사람을 들어 쓰신다는 말이다.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이 늙은 종이 이 세 가지를 겸비했다.


특히 이 늙은 종에게서 종으로서 꼭 가져야 하는 필수적 두 요소를 보게 되는데 첫째는 충성심이요, 둘째는 지혜로움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충성심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일하면서 자주 주변 사람들과 부딪쳐 결국은 일을 그르친다. 반대로 지혜는 있는데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시작해 놓고 끝을 맺지 못한다. 충성심이 부족해서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충성스럽고 지혜로워야 한다.


늙은 종이 보여 주는 충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첫째, 그는 충성이란 불평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 준다.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과 그이 고향 메소보다미아는 300~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노인의 걸음으로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험난한 광야길이며, 도적의 위험까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정이었다. 나이가 들면 주인만 힘든 것이 아니라 종도 힘든 법이다.


더욱이 이런 명령은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명령임을 그는 잘 알았다. 어떤 여인이 신랑될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주인도 아닌 늙은 종의 말만 듣고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시집오며, 그렇게 데리고 온 여인을 이삭이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다. 칭찬보다는 욕먹기에 십상인 일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불평했다는 기록이 없다.


충성이란 묵묵히 하는 것이다. 입으로 떠들며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어지러운 것은 충성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떠들고 공치사하고 불평하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충성은 묵묵히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잠잠하셨던 것처럼. 특별히 불평하며 충성하는 것은 이미 그 대가를 받은 것이므로 하늘의 상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