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드 코사드 / 굴복

오늘의 책 2015. 4. 25. 10:33 Posted by 따시쿵

저자 : 장 피에르 드 코사드 J. P. de Caussade


1675년 프랑스의 남부 케르시 주에서 출생하여 1705년 예수회의 사제로 임명된 뒤 여러 도시에서 학문과 신앙을 가르치다가 1751년 7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존재를 알게 해준 이 책은 코사드의 기도 노트와 여러 사람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과 여러 공동체에서 나눈 대화들이 기록으로 전해지다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의 글은 종파를 떠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전적인 자기 포기>와 <하나님께 완전한 굴복>이라는 내용을 강조함으로써 출간 이후 곧 프랑스 영적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종하는 마음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의 의무를 행하며 살아간다면 우리가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초연해야 한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뭐든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해야 한다. 방금 지나간 의무나 앞으로 다가올 의무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현재의 의무에만 제한해야 한다.


물론 나는 당연히 하나님의 법은 항상 당신의 앞에 놓여 있으며 우리가 즐겁게 굴복을 연습하면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민감해진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마음의 감동을 느끼고 이렇게 말한다. "어쩐지 이 사람에게 자꾸 끌려요"라거나 "어떤 책을 읽거나 어떤 조언을 주고받거나 확신을 받거나 어떤 물건을 치워버리거나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을이 들어요" 은혜의 영감에서 오는 이런 감동은 곰곰이 생각하거나 이유를 따지거나 미루면서 머뭇거리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의지가 전혀 끼어들지 않게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런 굴복의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표현한다.


그분이 계시하신 뜻은 평상시 우리의 의지를 대신해야 한다. 순간마다 행해야 할 의무가 있게 마련이다. 순종하는 영혼은 성실하게 의무에 임한다. 읽거나 들어서 배운 것은 잊혀지지 않으며 가장 단계가 낮은 초심자도 이보다 자신의 의무를 더 잘 이행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 굴복한 영혼들이 때로 이 책, 때로는 저 책에 끌리기도 한다. 또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몇 마디 논평을 하거나 소감을 얘기하게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하나님은 나중에 자기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용기를 줄 무언가를 알게 되도록 인도하신다. 무엇을 하든 그들은 이유는 몰라도 그 일을 하도록 인도받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것을 쓰고, 읽고, 묻고, 조사하라고 인도하시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렇게 지시하신 하나님은 나중에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다른 인도의 핵심이 될 일들을 말하자면 내 잠재의식에 비축해 놓으신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거의 알아보기 힘들게 "슬쩍 찌르는" 미약한 암시에도 이들이 온유하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즐거운 자기 굴복 상태의 유일한 규칙은 현재 이 순간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은 깃털처럼 가볍고 물처럼 막힘없이 흐르며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서 이런 은혜의 암시에 공이 통통 튀듯 쉽게 움직인다.


그들은 녹여 붓는 금속만큼이나 변함없고 견고하다. 부어지는 거푸집 모양에 따라 금속의 모양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처럼 이런 영혼들은 유연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택하신 어떤 모양으로든 쉽게 빚어진다. 한 마디로 그들의 성품은 공기를 닮아 불어오는 모든 산들바람에 잘 움직인다.


또 물처럼 어떤 용기에든 부으면 그 모양으로 변해 모든 갈라진 틈을 채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매끄럽게 펼쳐진 화폭 같아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까닭에 그분이 무엇을 그리고 싶어 하시는지 생각하거나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그분께 드려 그분이 시키신 일에 완전히 몰두한 까닭에 자신에 대해서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그것을 얻는 방법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순전하고 숨겨져 있어 비밀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대단찮아 보이는 그들의 작은 작품에 그들이 더욱 열정적으로 몰두할수록 하나님은 화려한 색으로 작품을 꾸미고 아름답게 만드신다. 사랑과 순종의 매끄러운 화폭 표면에서 그분의 손은 가장 아름다운 도안,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형태, 가장 거룩한 모양을 그려내신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시 4:3)


사실 그림 작업에 사용될 매끄럽고 깨끗한 화폭은 매순간 단 한 번의 붓질을 느낄 뿐이다. 망치로 끌을 여러 번 내리치지만 한 번에 생겨나는 흔적은 단 하나이며 되풀이해서 얻어맞는 돌도 그때마다 어떤 모양이 생겨나는지 알거나 보지 못한다. 끌에 깍여 줄어들고 쓸리며 모양이 어그러진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십자가상이나 조각이 되도록 정해진 돌도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만일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만일 말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제게 묻지 마세요! 제가 아는 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건 우리 주인의 손에 나를 가만히 맡기고 그분을 사랑하며 제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견디는 거예요. 앞으로 무엇이 될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그분이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결국 무엇이 될지 모르듯이 그분께서 내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사실은 그분이 하시는 일은 어쨌거나 최선이고 완벽하다는 거예요. 저는 그분이 끌로 저를 새기실 때마다 그것이 제게는 최고의 것이라 여기고 받아들입니다. 비록 실제로는 무너지고 깨어지고 흉해지는 느낌이 들지만요, 이것도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합니다. 저는 이를 넘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여기에 대해 알려 하거나 혼자 걱정하지 않고 이 뛰어난 장인이 하시는 작품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사랑스럽게 유순하게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자. 당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신에게는 최선의 것임을 확실히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당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라. 끌이 자기 일을 하고, 날카로운 바늘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하라. 화폭을 더럽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도 화가의 붓질이 무수한 색조로 화폭을 뒤덮게 하라.

 

온 맘을 다해 지속적으로 복종하며 당신 자신을 잊고 열정을 다해 의무에 전념함으로써 이 모든 하나님의 행하심에 협력하라. 주변의 모든 환경이나 특별히 세부적인 경치들을 모두 알려하지 말고 이렇게 당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계속 나아가면 한 걸음 한 걸음 어떻게 가야 할지 길이 보일 것이다.

 

사랑과 순종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외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고민하면서 걱정스럽게 묻는 것을 본다. "누가 우리를 지도해서 겸손하고 거룩해지며 완덕을 얻도록 하겠는가?" 이런 이들은 책들을 뒤져 이 경이로운 일에 대한 설명과 특징, 본질 따위를 찾게 하라.

 

하지만 당신 만큼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평화롭게 연합한 채 앞을 내다보려 하지 말고 확실하고 올바른 의무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천사들은 이 어두운 시간 동안 당신 옆에 머무르며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면 그분의 영감으로 당신에게 이를 알려주실 것이다.

 

 


 

 

시험이 가져오는 행복한 결과


지금까지 묘사한 순수한 믿음의 길 위에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잠시나마 죽음의 일면을 지닌다. 그렇다고 그리 놀랄 까닭은 없다.

 

그것말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이 상태에서는 아주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각 영혼을 위한 그분만의 계획이 있으시며 죽음이라는 변장 아래 이런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행된다.

 

"변장"이라는 용어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신체의 고통과 영적인 약점을 망라한 모든 실패다. 이 모든 것은 성공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모두 선으로 바뀐다. 그분이 고상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본성에 문제가 되는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롬 8:28)

 

그분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생명을 끌어내시므로 우리의 본성은 두려워하나, 믿음은 모든 것을 최선으로 여기며 용기와 확신에 가득 찬다.

 

하나임의 섭리가 죄를 제외한 모든 만물을 아우르시고 인도하시며 완성하심을 안다면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의 의무이다. 

 

바로 그들의 비천함이 오히려 믿음의 승리를 가져오므로 우리는 겉모습이 어떻든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모든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며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다가오는 매순간 행하고 겪어야 할 모든 일을 맞이해 기쁨과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고통과 문제, 어려움, 약함과 실패의 거센 물살에 빠져 휩쓸리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의 믿음의 삶을 유지하고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다. 

 

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은 육체의 죽음, 영혼의 상실로 여져지는 일, 세상사에 존재하는 상실 등 여러 모양을 지니고 매순간 비밀스럽지만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믿음은 이 모든 일들 가운데 자양분과 힘을 발견하다. 믿음은 이것들을 꿰뚫고 나가 생명을 주시는 분, 하나님의 손에 매달린다. 

 

죄에 물들지 않은 모든 것을 통해 신실한 영혼은 확신에 차서 나아가며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휘장이나 변장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안도한다. 

 

사실 겸손한 자를 위로하시는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황폐함 속에서도 만일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고 전적으로 그분께 영혼을 의탁하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내적 확신을 영혼에 부여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의 임재감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슬퍼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분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증하는 무엇이 존재한다. 우리가 마음이 불안하고 어지러울 때도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보이지 않은 닻이 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당신은 하나님을 찾아다니지만, 그분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모든 만물이 그분을 선포하며 만물이 당신에게 그분을 전한다. 

 

그분은 당신의 옆에서 동행하며 당신의 주위와 내면에 계신다. 그분이 거기 거하시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그분을 찾는다. 당신이 정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일 뿐, 당신은 실제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당신은 완덕을 추구하고 이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만물 속에 존재한다. 

 

당신의 괴로움과 행동, 당신을 이끄는 인도가 말하자면 그로 인해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신성한 "요소"들인데도, 당신은 숭고한 개념들을 좇아 헛되이 분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에 감싸여 당신에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마르다는 근사한 음식을 만들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내어주고 싶어하시든 그분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예수님께 품은 생각에 따라 동산 무덤 밖에서 그분을 찾았을 때, 그분은 동산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녀의 시선을 벗어나셨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들 역시 그분을 유령으로 오해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시고 순전한 믿음의 상태로 영혼을 고양시키시며 모든 종류의 상황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비밀을 발견하면, 그분은 더 이상 자신을 위장하지 않으신다.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거기 벽 뒤에 계신다. 그분은 창문에 난 격자를 통해 바라보신다" (캔트 2:9) 

 

본명 김창수, 金九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을미사변 때 일인에게 시해당한 명성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사형에 이르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3ㆍ1 운동 후 상해로 망명,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8ㆍ15 해방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 섰고,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1949년 육군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당해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며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火釜)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며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구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이나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럽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안매산(安梅山) 명근 형이 꿂어 주기기를 결심하고 조용히 묻거늘 나는 찬성하였다. 그가 3~4일 동안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하는 핑계로 음식을 끊었으나, 눈치 빠른 왜놈 간수가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진찰케 하고 매산을 결박한 후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을 풀어넣었다. 결국 매산이 "자살을 단념하겠노라"고 통보를 한 것을 보면,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데 되었도다.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는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으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를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 반기문

오늘의 책 2015. 1. 13. 04:0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지난주와 이번주는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현 UN사무총장이신 반기문 총장의 어렸을 때부터의 일대기를 쓴 책이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났으며, 중학교 때는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케네디 대통령도 만나고 온다. '케네디'대통령을 만나면서 그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외교관'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기문 총장님은 어렸을 때 공부를 그렇게 잘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뭐... 내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중1인 나는 개같은 점수를 받아온다;;;. 난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구절을 쓰겠다.

 

 

운동은 잼병, 공부에는 욕심쟁이

기문은 6학년 때 같은 반에 한승수라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기문과 승수는 주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주산  대회를 앞두고 기문은 한승수를 붙잡고 누가 주산을 더 빨리 하는기 겨뤄보자고 했다. 반기문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주판으로 셈하는 주산을 장려했다. 산수 시간에 주산을 따로 가르치고 주산대회도 종종 있었다. 승수는 기문의 말에 주판을 꺼내 따라락 하고 줄을 맞췄다. 심판을 맡은 친구 하나가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35 곱하기 24에 541을 빼고 7,832를 더하고 다시 81을 빼면?"

"8,050."

승수가 먼저 외쳤다. 몇 번 더 했지만 승수 녀석이 언제나 더 빨랐다. 먼저 내기를 건 반기문은 머쓱했다. 그런데도 다음날 또 다시 승수에게 겨루자고 했다.

그 이후로 둘의 주산 시합은 매일 이루어졌다. 시합을 하면서 기문의 주산 실력은 자꾸 좋아졌다. 결국 승수가 손을 들고 말았다. 기문은 결국 학교 대표로 주산대회에 나가게 됐다.

 

나는 반기문 사무총장님이 멋지다. 내가 쓴 구절에는 안나오는데, 그 분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셨는데 당당히 수도권 학생들을 이기고 미국 연수 티켓을 잡으셨다. 그리고 당시 가난했는데 공부를 그렇게 잘하시다니 놀랍다. 나는 오늘 내가 쓴 운동은 잼병, 공부에는 욕심쟁이 구절이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내가 운동은 욕심쟁이인데, 공부에는 잼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잘하지는 못한다. 나도 꿈이 외교관에 들어간다. 내 꿈은 내가 축구를 좋아해서 FIFA(세계축구연맹)직원이다. 그러려면 나도 영어를 잘해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한다. 뭐... 난 머리가 굉장히 에디슨보다 똑똑하기 때문에 식은죽먹기다 (자랑질 죄송ㅋ). 앞으로 책도 꾸준히 읽고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들어야겠다.

홍성욱 / 교회만이 희망이다

오늘의 책 2014. 12. 29. 14:57 Posted by 따시쿵

홍성욱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고등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Th. B),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육군 군목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에서 선교신학으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2006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환 교수(Visiting Scholar)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신학도를 위한 선교학 교재로 《선교학 개론》, 《선교와 디아코니아》, 《선교와 교회 성장》을 공저하였다. 또한 선교적 교회와 일꾼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교회만이 희망이다》, 선교적 교회를 향한 열망을 담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저술하였다. 이밖에도 신학생을 위한 선교학 교재 『선교학 개론』, 『선교와 교회성장』, 『선교와 디아코니아』를 공저했다. 영문 저서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of the Concept of God in Korea>을 영국 Regnum 출판사에서 《Naming God in Korea : The Case of Protestant Christianity》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현재는 안양제일교회 담임목사, 아시아빈곤선교센터(C.A.M.P....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고등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Th. B),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육군 군목을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에서 선교신학으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2006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환 교수(Visiting Scholar)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신학도를 위한 선교학 교재로 《선교학 개론》, 《선교와 디아코니아》, 《선교와 교회 성장》을 공저하였다. 또한 선교적 교회와 일꾼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교회만이 희망이다》, 선교적 교회를 향한 열망을 담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저술하였다. 이밖에도 신학생을 위한 선교학 교재 『선교학 개론』, 『선교와 교회성장』, 『선교와 디아코니아』를 공저했다. 영문 저서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of the Concept of God in Korea>을 영국 Regnum 출판사에서 《Naming God in Korea : The Case of Protestant Christianity》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현재는 안양제일교회 담임목사, 아시아빈곤선교센터(C.A.M.P.) 이사장, WEC KOREA 이사장, 교회성장연구소 법인이사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종이 쓰임 받는다


창세기 24장은 몇 가지 면에서 특이한 장이다. 첫째, 창세기의 50개 장 중에서 절이 가장 길다. 일반적으로 한 장이 30절 내외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창세기 24장은 67절까지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창세기 24장의 사건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록되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격이 일반적으로 인명을 상세히 기록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인공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이례적이다. 셋째, 창세기 24장의 사건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의 신분이 늙은 종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은 19세기에 있었던 사건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팔백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종의 위치는 짐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하찮은 종이 성경 한 장의 주인공이라니 특이한 일이다.


무엇이 이런 이례적 사건을 어용한 것일까? 무엇이 하나의 이야기를 67절까지 이어지게 했으며, 왜 늙은 종이 사건을 주도케 하고, 또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비중을 두어 전개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종의 위대함에 있다.


창세기 24장은 나이가 많아 죽음을 앞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택하기 위해 고심하며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꼭 자신의 고향에서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그는 고향까지의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하자 그 일을 늙은 종에게 위임했다. 어떤 기존도 제시하지 않고 늙은 종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종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과 그분이 신뢰하시는 종의 관계를 본다. 창세기 24장의 늙은 종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의 모범을 본다. 이 종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게서 기뻐하시는 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사람의 주변에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종은 사명 최우선 자세로 나타난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에게는 3H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Head, 둘째는 Heart, 셋째는 Hands 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있고 열정이 있는 실천의 사람을 들어 쓰신다는 말이다.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이 늙은 종이 이 세 가지를 겸비했다.


특히 이 늙은 종에게서 종으로서 꼭 가져야 하는 필수적 두 요소를 보게 되는데 첫째는 충성심이요, 둘째는 지혜로움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충성심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일하면서 자주 주변 사람들과 부딪쳐 결국은 일을 그르친다. 반대로 지혜는 있는데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시작해 놓고 끝을 맺지 못한다. 충성심이 부족해서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충성스럽고 지혜로워야 한다.


늙은 종이 보여 주는 충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첫째, 그는 충성이란 불평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 준다.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과 그이 고향 메소보다미아는 300~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노인의 걸음으로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험난한 광야길이며, 도적의 위험까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정이었다. 나이가 들면 주인만 힘든 것이 아니라 종도 힘든 법이다.


더욱이 이런 명령은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명령임을 그는 잘 알았다. 어떤 여인이 신랑될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주인도 아닌 늙은 종의 말만 듣고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시집오며, 그렇게 데리고 온 여인을 이삭이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다. 칭찬보다는 욕먹기에 십상인 일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불평했다는 기록이 없다.


충성이란 묵묵히 하는 것이다. 입으로 떠들며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어지러운 것은 충성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떠들고 공치사하고 불평하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충성은 묵묵히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잠잠하셨던 것처럼. 특별히 불평하며 충성하는 것은 이미 그 대가를 받은 것이므로 하늘의 상급이 없다.


호날두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오늘의 책 2014. 12. 26. 19: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호날두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번 주에는 '호날두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책을 읽었다. 호날두는 내가 축구선수들 중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선수이다. 호날두의 풀 네임(Full Name)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도스 산토스 아베이로(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이다. 흔히 우리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고 부른다. 호날두는 1985년 2월 5일에 태어났으며 국적은 포르투갈이다.

 

프리킥 : 데뷔 후 장착한 신무기, 무회전 킥의 비밀

호날두가 개인 추가훈련을 통해 발전시킨 기술 중 가장 큰 화제를 모른 것은 이제 그의 전매특허가 된 무회전 프리킥이다. 스포르팅아카데미 시절에도 동료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샤워를 끝낼 때까지 호날두는 훈련장 위에 있었다. 프리킥 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호날두는 프로 데뷔 후 프리킥으로만 총 40골을 넣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맨유 입단 후 기록한 공식 1호골을 프리킥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2003년 1월 11일 포르머스와의 프리미어리그 홈경기에서 호날두는 왼쪽 측면의 먼 거리에서 시도한 오른발 프리킥 슈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프리킥은 무회전 킥이 아니었다. 곧게 뻗은 몸으로 공을 응시하면서 집중하던 슈팅 자세는 비슷했지만 오른발 감아차기 슈팅이었고, 문전에서 한 차례 바운드 된 후 골문 안으로 이어졌다. 헤딩 경합을 준비하던 공격수와 수비수가 엉키면서 골키퍼의 시야를 가린 것이 도움이 됐다.

'호날두 로켓'이라는 별명이 붙은 무회전 프리 득점(호날두 스스로 자신의 프리킥을 '로켓'이라고 표현했다.)이 처음 터진 것은 2006년 2월 4일 풀럼전이다. 페널티 에어리어 후방 정면에서 강하게 때린 볼이 회전없이 흔들리며 수비벽을 넘어 상대 골키퍼를 무력화시켰다. 그 사이 세비야, 유럽선발팀 등 친선전에서 무회전 킥을 성공시킨 호날두는 2006년 11월 4일 포츠머스와의 리그전에서 프리킥 득점 기록을 이어갔다.

호날두는 2007/2008시즌에 프리킥으로만 5골을 넣었다. 이때부터 프리킥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져 2008/2009시즌에는 6골을 프리킥으로 득점했고, 레알마드리드 이적 후 포르투갈 대표 경기를 포함에 26골을 추가했다.

호날두는 자신이 구사하는 프리킥의 비밀이 무엇인지 묻자 "나만의 방법이 있지만 비밀이다. 상대팀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집대성한 기술을 완전히 숨기지는 않았다. "프리킥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정대적으로 내 몸의 위치에 의해 좌우된다. 킥을 차는 순간의 몸의 자세, 공을 향해 달려가는 방향, 그리고 디딤발의 위치가 중요하다. 킥을 하기 위해 달려갈 때는 언제나 골문의 어느 방향을 노릴지만 생각한다. 먼저 공을 보고, 골문을 본 다음, 차는 것이다. 프리킥을 시도할 때는 자기암시를 통해 잘될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감을 주지만, 솔직히 확률은 반반이다. 잘되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그래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지난번보다는 잘 차려고 노력한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봤던 소제목이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해서 친구들이랑 할때 무회전 프리킥을 차려고 동영상들도 많이 보고 연습해본다. 무회전 프리킥을 성공시키면 나도 놀라고 친구들도 놀란다. 그 다음에 프리킥을 찰때는 발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친구들이 무회전 프리킥을 또 차나 보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남아공월드컵 때 박주영이 나이지리아 전에서 감아차기 골을 넣었을때 그 감아차기르 따라했는데, 이제는 호날두의 무회전 프리킥을 따라하게 된다. 이제는 독수리 슛을 연마해야겠다.

 

한국 대표 수필선

오늘의 책 2014. 12. 21. 16:4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는 요즘 책을 안읽었기 때문에 책을 스파르타 식으로 읽기로 엄마와 아빠랑 약속을 하였다.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자는 것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싫더라도 해야되는 것이었다. 

이번주에 내가 읽었던 책은 '한국 대표 수필선'이었다. 내가 어릴적에 읽었어야만 했던 책이었지만 그당시 책을 안 읽었기 떄문에 이제와서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미가 없었으나 읽다보니 점점 재미있었다. 이 책은 수필이며 이규보, 정약용, 윤오영 등 작가들의 수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참고로 수필이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며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뉜다'라는 뜻이다.

 

 

내가 제일 인상깊었던 수필가는 정약용이었다. 나는 그를 논술을 배울떄 목민심서를 배웠었고, 오늘 오후에도 가족과 다산정약용 유적지를 갔다 왔기 때문이다. 그가 쓴 수필의 제목은 '수오재기'이었으며,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돌아가셨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이다. 실학 사상을 발전시키고 집대성했으며, 조선후기의 현실은 사실주의적인 시각으로 그려 낸 다양한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 저서에는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심서>등이 있다.

 

수오재기에서 첫머리에 작자는 '수오재'가 작자의 큰형님이 자신의 방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큰형님'은 정약용의 이복 맏형인 정약현을 가리키는데, '수오재'는 정약현의 호이기도 한다. '수오재'란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이고, '기'란 '건조물이나 산수의 유람을 적은 한문 문체'라는 뜻이다.

그 후 귀양살이를 하던 어느 날, 작자는 문득 이 말의 의미를 꺠닫게 된다. 젊은 시절에 그는 '세상 모든 것은 지킬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나 자신은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작자는 '대체로 천하 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고 깨닫는다. 이 말은 무를 세상에서 가장 애써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김세윤 / 구원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책 2014. 10. 11. 11:23 Posted by 따시쿵

김세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싱가포르 Discipleship Training Center, 영국 런던대학교,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다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F. F. Bruce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했고, 독일 홈볼트 연구 교수, 싱가포르와 미국 칼빈 신학교, 풀러 신학교,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했다. 국내에서는 아세아 연합 신학대학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 교회에 대한 소명을 따라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과정(D. Min)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The Origin of Paul's Gospel』(Tubingen : Mohr-Siebeck, 1981: 제2수정판 1984 ; Grand Rapids : Eerdmans, 1982)과 한국어역 『바울 복음의 기원』(엠마오, 1994),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Tubingen : Mohr-Siebeck, 1983: Grand Rapids : Eerdmans, 1985)과 한국어 『“그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엠마오, 1994)이 있으며, 『구원이란 무엇인가?』(성경읽기사 초판 1981 ; 두란노 개정판 2001), 『주기도문 강해』(2000), 『예수와 바울』(2001), 『바울 신학과 새 관점』(2002), 『데살로니가전서 강해』(2002), 『빌립보서 강해』(2004 이상 두란노), 『가이사를 얻으라』(노잉힘 2008) ,『Christ and Caesar: The Gospel and the Roman Empire in the Writings of Paul and Luke』(Eerdmans, 2008), 『칭의와 성화』 등이 있다.





'자기 주장 의지'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

 

구약의 창세기 3장에 명료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분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즐기며 살도록 하셨습니다(창 1:26 - 30). 이것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것들(하나님의 재산, 하나님의 자원)을 먹고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인간은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신 선한 의지(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저버리고, 악과 고난만을 가져다 주는 사탄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아다뫄 하와의 불신과 불순종의 동기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사탄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 곧 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를 갖도록 항상 충동질합니다(창 3:5).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순종으 인간의 비하이며 속박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가 주가 되어 뜻대로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온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충동에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자기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그의 무한한 자원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됩니다. 

 

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로 자기 생명의 창조주인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분리된 뿌리 뽑힌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제한된 수분과 영양분이 있을 때까지만 잠시 살다가 곧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맙니다. 그의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더 이상과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풀이 땅에서 뽑히는 순간 그 풀의 죽음은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잎사귀가 마르고 꽃이 떨어지고 시들어 가는 현상을 가리켜 그 풀 속에서 역사하는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닫아 버렸더라도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제한된 자원에 의해 얼마 동안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원의 제한성 때문에 존재는 고난으로 얼룩지고, 자원이 고갈되어 감에 따라 말라 비틀어지는 풀 한 포기처럼 무덤에 묻히고 맙니다.

 

 

목숨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의 가르침이 한마디로 잘 요약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 길지 않은 이한 구절의 말씀 안에 예수의 자기에 대한 이해와 자기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요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두 예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 이하와 이사야 53장입니다. "인자(人子)"라고 번역된 것은 다니엘서를 반영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기록된 것은 이사야서를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인자(人子) 한 번역은 상당히 애매합니다. 정확히 하려면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주(主)'다.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면 그런 신앙 고백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셨지만, 직접 그런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마 16:13-20). 그러므로 예수님이 독특하게 사용하신 이 칭호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또한 예수님 스스로가 가져 온다고 주장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A.W 토저 /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의 책 2014. 8. 11. 07:28 Posted by 따시쿵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목사이자 저술가였다. 18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버그에서 태어났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1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 교회에서 44년간 목회를 했고, 그 중 31년을 시카고의 '남부 동맹 교회'에서 시무했다.


경건시와 신비주의적인 찬송, 에머슨과 셰익스피어의 글을 좋아한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풍성하고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절충하여 타협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이나 십자가 없는 성공 처세술을 전하는 것은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나님을 추구함』,『경건 생활의 기초』,『패배를 통한 승리』,『하나님을 바로 알자』『거듭난 자의 생활』,『경건 생활의 기초』,『경건 생활의 비결』,『예수 방향으로 가라』등이 있다.




성경의 진리를 자신에게 비추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3-5)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진리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어떤 진리가 성경 안에 있으므로 그것이 자동적으로 그들에게 진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너희가 '주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3, '만일'이라는 단어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주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이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베드로는 '만일(if)' 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그는 "만일 너희가 주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을 맛보았다면,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이 너희에게 적용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분이 인자하시다는 것을 맛보지 못했다면 너희는 처음으로 돌아가 먼저 그분이 인자하시다는 것을 맛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전진이 가능해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신약이 말해주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고, 또 주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끝까지 받아 들이는 것


베드로전서 2장 3절의 원어의 의미를 찾아보기만 하면 우리는 '맛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말은 어떤 것을 삶 속에서 온전히 체험하여 그것을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맛보다'라는 표현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내리려는 사람들은 이 히브리서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신약에 나오는 '맛보다'라는 표현이 '단지 자기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를 알기 위해 슬쩍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죽음을 단지 시험적으로 슬쩍 맛보셨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전서 2장 3절에 사용된 원어와 히브리서 2장 9절에 사용된 원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과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슬쩍 맛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것은 체험하고 통과하고 부딪히고 끝까지 견뎌내는 것을 의미한다.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선물과 그것의 근원을 분리해서는 안 되며,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나는 용서받았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라고 말해야 한다. "내게는 영생이 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내게 영생을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내 삶 속에 계신다"라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하니님과 하나님의 선물을 분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그분 자신을 주시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용서를 받았다면 그것은 용서의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져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체험하게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분에 집중해야 한다


아주 좋지 않은 예가 복음서에 나오는데 그것은 주님을 만난 열명의 나병환자가 치료를 받았지만 그들 중 한 명만이 주님께 감사한 사건이다. 그들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건강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들 중 아홉 명은 건강이라는 선물에 만족하여 그들의 길을 계속 갔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기억했다. 그의 관심이 선물 자체에서 선물을 주신 분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주님께 감사했다. 그때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아홉 사람은 선물 자체에 만족하는 것으로 끝났다. 오직 한 사람만이 다시 돌아와 선물을 주신 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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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안 /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오늘의 책 2014. 7. 14. 09:54 Posted by 따시쿵

저 : 위지안


于娟

1979년 생. 상하이 자오퉁대학교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 유학한 뒤 돌아와 상하이 푸단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꼬마 깡패’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으로는 소문난 독서광이었으며, 지는 것을 싫어해 공부에서든 놀기 또는 먹기에서든 항상 또래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곤 했다. 


환경 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유학을 갔다가, 이른바 ‘노르웨이 숲’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숲에 미래가 있다’는 비전을 세운 채 중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숲에서 화석 연료를 대체할 에너지를 생산하는 ‘에너지 숲 프로젝트’를 정부에 제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던 2009년 10월, 갑작스럽게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이륙 준비를 마친 우주선이 카운트다운 직전에 어이없이 폭발해버린 것처럼, 그녀의 삶은 절정의 순간에서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곧 좌절과 분노를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남겨진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깨달은 것들을 일상의 에피소드와 함께 블로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앞에 남겨진 삶이 길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지켜냈으며, 낙천적인 태도로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소박한 행복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혜를 배웠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된 사람도 많았다. 삶의 끝에 이른 그녀가, 살아갈 날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 셈이다. 위지안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일깨워주고는 2011년 4월 19일 새벽 세 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영혼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믿음은 순도 100퍼센트라는 것


어느 날, 맥도널드가 이런 말을 했다.

"그야 우리는 서로 믿으니까. 지안, 당신이 겨냘 거라는 사실을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게다가 우리보다 더 많이 변한 건 바로 당신이야.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려는 당신의 의지가 우리들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믿음이라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믿음이란 오로지 순도 100퍼센트일 뿐이다. 조금 덜 믿거나 아주 조금만 의심해도 사라지는 게 믿음이기에 그저 '믿느냐, 안 믿느냐'뿐인 것이다.


처음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을 나 혼자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삶의 최후 순간까지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고개만 돌려보아도 바로 옆에, 그리고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와 사람들 사이에는 강고한 믿음이라는 끈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가 아닌 것이다.



감추고만 싶은 진심도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물병으로 눈길이 갔다. 매일 새벽 어두운 산길을 절뚝절뚝 걸어 올라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떠 온 물에다 기도를 하고, 또 그 물오 약재를 우려낸 뒤 물병에 싸 들고 아침 일찍 병원까지...


맥도널드가 수건으로 내 눈가를 한참 닦아주었다.


"정성이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매일 지속되는 사소함에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빠가 불편한 다리로 산에 오르고, 그토록 싫어하던 기도를 한다는 것도 그랬지만, 그런 진심을 끝내 내게 감추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세상엔 끝끝내 감추고만 싶은 진심도 있는 것이었다. 특히 남자들의 진심은.



누구나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


내가 '여성성;을 잃고 싶지 않아 갈등하고 있을 때, 남편은 나를 잃을까봐 애를 태우고 있었다. 털털하기만 했던 내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여자인 모양이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늙어 보일까봐'를 걱정하다니.


만일 삶이란 게 혼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 더 쉽게 포기하고 더 빨리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혹독한 시간들을 버텨내고 난소에 집착하는 욕심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누구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힘들어지거나 슬픔에 빠지게 되면 그 빚이 어떻게 새로 생기는지 느낄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빚이 너무 엄청나서 헤아릴 수도 없지만...


"우리는 가족과 친구, 소중한 이웃들에게

이떤 형태로든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행복한 것은, 언제난 갚아야 할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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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M. 바운즈 / 기도의 능력

오늘의 책 2014. 6. 6. 20:13 Posted by 따시쿵

E. M. 바운즈 (Edward McKendree Bounds)


1835년 8월15일 미주리주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법정 일을 해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살이 되기 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24살 때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갑작스럽게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고,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첫 설교는 몬티첼로라는 인근 마을의 조그만 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1894년 내쉬빌에서 은퇴하기까지 감리교 목사로 사역하였다. 은퇴 후에는 집필, 순회부흥 사역에 힘쓰며 기도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 중 『기도의 능력』과 『부활』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간되었고, 다른 책들은 그가 죽고 난 후 바운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호머 핫지가 바운즈의 친구인 클로드 칠턴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이렇게 출간된 저서들은 1913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선지자'로 불리우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 그리고 교인수 증대를 위해 새로운 방법, 새로운 계획, 새호운 조직을 궁리하는 데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있다.


현대의 이런 추세는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하거나 계획과 조직 속에 사람을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을 중시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교회는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은 더 나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게획이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하나님꼐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6)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사 9:6)


온 세상의 구원이 요람에 누인 그 아들로부터 온다. 바울은 세상에 복음을 심은 사람들의 인격적 특성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의 비밀을 풀었다. 복음의 영광과 효력은 그것을 선포하는 사람들에세 달려 있다. 하나님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 16:9)


라고 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성과, 그분의 능력을 세상에 펴시기 위한 통로로서 사람을 의지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진리는 이 기계 문명의 시대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이 진리를 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마치 태턍이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과 같이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흑암과 혼돈과 죽음이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하니요, 기발한 방법고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성령은 기계에 임하지 않고 사람에게 임한다. 성령은 계획에 기름을 붓지 않고, 사람에세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한 훌륭한 역사가는, 국가의 혁신은 민주주의 정치가나 철학적 역사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개인의 인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도 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인격과 행동이 세계를 기독교화하고, 개인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담겨 있는 질그릇에 따라


복음의 성격과 운명은 설교자에게 달려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메시지를 세우거나 혹은 망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기름이 통과는 금관(金管)이다. 이 관은 금으로 되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막히지 않아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기름이 온전히, 아무 거침없이, 그리고 낭비됨이 없이 흐르게 된다.


사람이 설교자가된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드셔야 한다. 할 수 있으면, 설교자는 메시지보다 나아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든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오는 생명을 주는 젖은 바로 어머니의 생명인 것처럼, 모든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의 인격에 의해 형성되고 물들여진다. 보화가 질그릇 속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그릇의 냄새가 보화를 아름답게 할 수도 있고 추하게 할 수도 있다.


설교의 배후에는 설교자가 있다. 설교는 한 시간 동안 하는 공연이 아니다. 설교는 삶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 편의 설교를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그 사람을 만드는 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설교는 삶의 문제이다. 사람이 성숙하면 설교도 성숙한다. 또한 사람이 능력 있으면 설교도 능력이 있다. 사람이 거룩하면 설교도 거룩하다.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면 설교에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다.


바울은 그것을 "나의 복음"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특성으로 복음을 전락시켰다거나, 복음을 이기적으로 전용함으로써 변질시켰기 떄문이 아니다. 복음이 바울의 가슴속에, 피 속에 들어 있어서 바울의 속성에 의해 인격적인 신뢰가 이루어지고, 그의 불 같은 영혼의 불 같은 능력에 의해 불이 붙여지고 능력이 부어진다는 의미이다.


바울의 설교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또 그 설교는 어디에 있는가? 영감의 바다 위에 조각조각 떠다니는 마른 뼈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설교보다도 더 위대했던 사람 바울은 교회를 빚는 그의 손과 함께 변함없이, 온전히, 영원히 살아 있다. 설교는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는 정적 속에 죽고, 본문은 망각되며, 설교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설교자는 살아 있다.


생명을 주는 능력에 있어서 설교가 사람을 능가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한다. 그리고 죽은 설교는 영혼을 죽인다. 모든 것이 다 설교자의 영적 특성에 잘려 있다.


거룩함의 천국


율법 시대의 대제사장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흉패를 달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설교자도 모두 이와 동일하게 거룩한 표어에 의해 다듬어지고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의 사역이 그 성품의 성결함과 목적의 성결함에 있어서 유대 제사장들보다 못하다는 것은 울어 마땅한 수치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나는 더욱 거룩하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열심을 다해 계속 노력했다. 내가 바랐던 천국은 바로 거룩함의 천국이가."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기의 물결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복음은 그것을 밭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설교자가 복음을 인격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의 신적이고 가장 뚜렷한 특성들이 그 사람에게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 강권하는 사랑의 능력이 설교자 안에 있어서 투사하고, 그러내며,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자기를 잊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힘이 그의 존재, 그의 심장, 그의 피와 뼈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겸손으로 옷입고, 온유 안에 거하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며,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왕의 고고함을 지닌 자원하는 종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아가야 한다.


설교자는 철저히 자기를 비우는 밉음과 자기를 불태우는 열심으로 사람믈 구원하는 일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이 세대를 붙들어 하나님을 위한 세개로 만드는 사람은 진실하고 영웅적이며 가슴이 뜨겁고 두려움을 모르는 순교자여야 한다. 만일 그들이 비겁하게 시간이나 떄우는 자이거나 높은 자리나 찾는 자라면, 만일 그들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자거나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만일 그들의 믿음 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의 자기 부인이 자신이나 세상의 말에 의해 무너진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교회도 세상도 붙들 수 없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가장 날카롭고 가장 강한 설교를 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 가장 어렵고, 까다롭고, 힘들고, 철저한 일을 해야 한다. 열두 제자를 훈련시킨 일은 위대하며, 어렵고 영속적인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설교자는 설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고 성도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사람과 성도로 만든 사람만이 이 일을 위해 제대로 훈련된 사람이다.


 가장 강한 무기를 지니라


하나님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위대한 재능이나 위대한 학문이나 위대한 설교자가 아니다. 거룩함이 위대한 사람, 믿음이 위대한 사람, 사랑이 위대한 사람, 충성이 위대한 사람,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사람- 강단에서는 항상 거룩한 설교를, 강단 밖에서는 거룩한 생활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위해 한 세대를 빚을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천국의 모형을 닯은 견고한 형상의 설교자, 즉 영웅적이고 꿋꿋하고 군사 같으며 성자 같은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요, 심각하고 어렵고 순교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 세대를 향해 한 말을 자신에게 적용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개를 태 안에 품었다.


설교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도는 설교자의 가장 강한 무기이다. 기도는 전능한 힘이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능력을 준다,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사람 - 하나님의 사람 - 은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삶과 그의 가장 깊은 확신들은 그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 태어난다. 그의 영혼이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고뇌하는 것, 그의 가장 무게 있고 가장 감미로운 설교는 홀로 하나님과 있을 때 얻어진다. 기도는 사람을 만든다, 기도는 설교자를 만든다. 기도는 목사를 만든다.


오늘날의 강단은 기도하는 데 약하다. 학식에 대한 자랑은 겸손히 의뢰하는 기도를 방해한다. 강단에서의 기도는 단지 예배 형식을 같추기 위해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현대의 강단에서 기도는 바울의 삷과 사역에 있었던 것 같은 강력한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기도가 큰 능력이 되지 못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무능한 자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를 진보 시키는 일에 무능력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