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축구화를 사다!!!

축구와 야구 2013. 2. 11. 17: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늘 드디어 내가 바라고 바라던 축구화를 샀다.

내가 1년 전에 4개월이 지난 축구화를 이마트에서 샀다.

그러나, 나의 발이 자꾸자꾸 크면서 그 축구화가 조여졌다. 나는 축구를 할때마다 엄지발가락을 오므리고 축구를 조금 불편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어제 세뱃돈 받은 걸로 새 축구화를 장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호날두가 신고 디자인까지 제작했던 바로! '머큐리얼 빅토리' 를 샀다.

요고

이 축구화이다. 나이키에서 만든 축구화이다.

이름은 '머큐리얼 빅토리' 이다.

머큐리얼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등급이 낮다.

머큐리얼 등급에는 (머큐리얼) 빅토리 → 글라이드 → 미라클 → 베이퍼 → 슈퍼플라이 순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초등학생이라 빅토리를 샀지만, 내가 만약 이 축구화가 또 작아지면, 나중에는 미라클이나 베이퍼를 사겠다.

오늘 2시에 산거라 아직 신어보기만 했지, 축구를 해보지는 못했다. 언젠가 축구할 시간이 되면 꼭 이 축구화를 신고 뛰겠다. 

 

 

정호승 - 나무에 대하여

좋은 글귀 2013. 2. 7. 10:0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무에 대하여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중에 가정을 꾸리면 거실에 표구로 만들어 매달자"라고 당신이 써 놓았더군, 이 시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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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오늘의 책 2013. 2. 3. 18:48 Posted by 따시쿵

박상진(朴相珍)


 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2004),『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랜덤하우스중앙, 2004),『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를 비롯해 전문서인『목재조직과 식별』(향문사, 1987) 등 여러 저서를 펴냈다

 

 

 

 

역사의 격변을 묵묵히 지켜보다

헌법재판소 백송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안에는 11그루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사람 등살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공해 도시 서울에 수백 년에서 천 년 가까이 살아가는 늙은 나무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약해빠진 노(老) 생명체가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아직은 '희망의 땅'이라는 증거라서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 중 수도 서울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헌법재판소의 백송을 찾아가 보자.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에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계유정난'이란 이름의 쿠테타가 일어난다. 피바다가 돼버린 마을에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재를 가져다가 뿌렸다. 이루 '잿골'이 됐다가 지금의 재동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참극이 벌어졌던 재동의 한 편에는 핏빛에 어울리지 않은 깨끗한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한양에는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즈음, 누군가가 멀리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생장이 느린 백송도 조금씩 몸집을 키워가는 사이, 자람 터는 어느덧 영조 때 유명한 재상 조상경의 집이 돼 있었다. 그는 7번에 거쳐 판서를 지내면서 조선 후기 풍양조씨 세도정치릐 추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이후 백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는 조씨 일가와 함께 영광의 세월을 함께 했다.

 

 


 

새마을 운동도 피해간 신령스러운 숲

원주 성남리 성황림

 

중앙고속도로 신림IC를 나와 영월쪽으로 접어들었다가 곧 좌회전 후 잠시면 도로 옆 평지에 펼쳐진 숲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서낭신을 모신 대표적인 성황림(城隍林)이다. '대동여지도'에 신림(神林)이란 이름이 나올 만큼 오래된 숲이다. 멀리 치악산 국립공원의 남쪽 끝에 우뚝 솟아오른 남대봉에서 발원한 주포천이 숨가쁜 물길을 잠시 멈춘 편평한 땅,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삶의 터를 잡았다. 당연히 마을을 지켜주고 소원을 빌 공동의 성황당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서낭나무를 심고 주위에 숲을 만들어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낭나무 한 두 그루로 서낭당 가꾸기에 만족한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비교적 넓은 숲을 마련했다. 한 평의 농경지고 아쉽지만 이렇게 평지를 서낭숲으로 가꾼 데는 홍수 조절의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림'이란 이름 그대로 신이 사는 숲,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개화기의 혼란과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사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숲은 세월이 지나면서 위 서낭과 아래 서낭으로 나위어 졌고, 일찍이 학술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일제때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로 지정됐다. 1962년 우리 손으로 다시 천연기념물 92, 93호로 이름 바꿈을 했다.

 

 


 

조선 관리들의 희로애락

평창 옛 운교역 밤나무

 

밤나무골 º 밤나무고개 º 율동(栗洞) º 율목동(栗木洞) º 율전동(栗田洞) 등 밤나무가 들어간 지명은 의외로 흔하다. 밤나무는 열매와 목재 모두 쓰임이 많아, 1천여 종에 이르는 이 땅의 나무 중 우리와 가까이 지낸 나무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친숙하다. 6월에 회백색 꽃이 피었다가 가을밤 알밤을 거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거리의 군밤까지, 밤은 여러 번 변신을 한다.

 

밤나무는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천연기념물 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것은 최근 지정된 옛 운교역 밤나무뿐이다. 밤나무혹벌이라는 눈꼽 크기 남짓한 벌레의 피해를 받아 재래종 밤나무 고목이 거의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운교리 밤나무는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에서 방림, 평창으로 들어가는 42번 국도 옆 작은 음식점 뒤편 산비탈에 자라고 있다. 뿌리목 둘레가 6.4m나 되니 굵기는 지름 2m를 훌쩍 넘긴다. 1.5m 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있고, 갈라진 줄기도 지름이 1m가 넘는다. 나무 키는 14m이며 굵은 가지 여러 개가 얼기설기 뻗어 있다. 흔히 만나는 재배 밤나무와는 달리 엄청난 굵기가 놀라울 뿐이다. 고목으로서의 의젓한 품위와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돋보인다.

  


 

나라의 큰 일을 예언하다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영월읍내의 끝자락 언덕바지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주변에는 낮은 단층집이 몇 채 있고 멀리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을 이루는 합수(合水) 지점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 나무는 영월엄(嚴)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당나라 현종(712~756)때 파락사로 신라에 왔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고향 땅이 어수선해지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마치 배의 모양이므로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은행나무를 심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봉서 신범(辛汎, 1823~1879)이란 분이 있다. 규장각에 보관된 그의 시문집 '봉서유고(逢西遺稿)'에 실린 '월행(越行)'이란 기행문의 내용에는 그가 본관인 영월을 찾아 남긴 시 한 수가 있다. '발산은 평지에 멈추고/강 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구나/마을의 가운데는 천년된 은행나무가 자라고/예뿌터 엄씨들이 살고 있네.'

 

이를 통해 150여 년 전에도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었고 엄씨의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심은 은행나무를 엄씨들은 대대손손 보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14.8m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2003년 문화재청 일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이다.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이는 1,300년으로 양평 용문사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보다 2백년 앞선다.

 

 


 

쫒기던 임금도 쉬어가다

울진 실직국왕 굴참나무

 

고려 충숙왕 16년(1329) 정월, 임금은 황해도 평주의 천신산 아래 가옥(假屋)을 짓고 벌써 몇 달째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임금 노릇은 팽개치고 놀이에 열중한 것이다. 어느 날 지붕에서 물이 새자 사람들에게 "지붕을 덮는데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굴참나무 껍질이 가장 좋습니다."고 말했다. 곧장 백성들을 동원해 겨울나무 껍질을 벗기니 모두 고통스러워했다.

 

이처럼 옛부터 굴참나무의 가장 중요한 쓰임은 지붕을 이는데 있었다. 두께가 3~4cm 나 되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연이 준 방수물질이며 뛰어난 보온성을 가졌으니, 지붕 이는 데는 따라 갈 재료가 없다. 그래서 굴피집은 굴피나무가 아니라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든다.

 

굴참나무는 또 다른 쓰임이 있다. 다른 참나무처럼 흉년이 들면 풍년 때 보다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아,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울진의 굴참나무 한 그루를  찾아 본다.

 

동해안을 따라 길게 세로로 뻗은 7번 국도는 동해바다와 함께 달린다. 멀리 수평선에 걸쳐진 구름 한 조작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을 수 있다.

 

강릉과 포항의 가운데쯤이 울진읍이다. 읍을 벗어나 우회전하면 불영계곡 입구. 집 몇 채가 있는 삼거리의 마을 뒷산의 굵기가 네 아름에 이르는 굴참나무 한 그루가 동해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굴참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앞에 서서 훑어보면 정말 호호 할아버지 나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늙은 굴참나무다. 온통 충전물질로 채워둔 몸통과 울퉁불퉁 살아온 역사를 새겨놓은 껍질이 우선 그러하다. 약 3m 정도의 높이에서 굵은 가지 하나가 바다를 향해 거의 수평으로 길게 뻗은 모습도 힘에 겨워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것 같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보다 훨씬 늦지만 그래도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나무라고 다를 바 없다.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제는 기력이 쇠진해 있다. 그래도 앞에 서면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우리를 압도하는 위엄을 갖고 있다.

 

 


 

소나무 베어 팔아 마을을 지키다

예천 금당실 솔숲

 

살기 좋은 땅을 길지(吉地)라고 한다. 오늘날이야 자고 나면 값이 뛰는 땅이 길지이겠지만, 옛 사람들은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고 천재지변에도 안전한 곳을 최고의 길지로 생각했다. 경북 예천의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 마을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전국 열 곳에 이르는 살기 좋은 땅(十勝지之地) 중 한 곳이다. 선정기준을 따로 말하지 않았으니, 하고 많은 우리 금수강산에서 왜 이곳이 네번째의 좋은 땅으로 선택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기야 '십승지지'란 곳이 임진강 이북은 한 곳도 없고, 경상도가 다섯 곳이나 들어 있으니, [정감록] 저자가 자기가 아는 곳에서만 골라 넣은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복천, 용문사 계곡, 청룡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만나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살기 좋은 길지라고 했지만 물난리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단점을 가진 명당을 우리 선조들은 비보(裨補), 즉 모자람을 채워 넣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홍수가 마을로 들이 닥치는 것을 막아주고, 넓은 들판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곳이라 바람을 막아줄 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숲을 만들었다. 이런 목적의 숲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느티나무, 왕버들, 팽나무 등의 활엽수를 심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용문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겨울 바람이 문제였다.늦가을부터 불어대는 북서풍 칼바람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 안으로 사정없이 불어 닥쳤다. 그래서 깊이 뿌리를 박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으면서 무리지어 살기를 소나무가 제격이었다.

 

사실 이곳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무덤이 있을 만큼 오래된 마을이니, 아주 옛날부터 숲은 수호신처럼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을 터이다.그러나 구한말 나라가 어수선해지면서 수천 년을 지켜온 솔숲은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 1863년 동학의 접주 최제우가 체포돼 처형되는 혼란기에 민심이 흔들리면서 큰 나무들이 잘려 나가는 등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892년 7월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진다.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러시아인이 주인인 금광회사의 광부들 몰래 금을 캐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금을 캐는 것 자체보다 배 모양의 마을을 굳게 붙잡아 맬 닻의 역할을 할 오미봉을 파헤친 것에 더욱 격분했다. 마을의 양반들은 하인들을 시켜 광부들을 쫓아내려다가 사람이 몇 죽으면서 30여 명이 관청에 잡혀가고 만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하인들을 구출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숲의 소나무를 베어 충당했다. 그 결과, 숲이 온통 쑥대밭이 돼 버렸다.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은 1895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관직을 버리고 금당실로 내려온다. 그는 이곳에 95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솔숲 다시 가꾸기에 정성을 쏟는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사산송계(四山松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숲 가꾸기에 동참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리미가 의연하게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안동 진성이씨 종택 뚝향나무

 

안동에서 35번 도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청머리재란 고개다. 고개 넘어 중앙선 철로 밑을 지나 주유소가 있고 '진성이씨 종택' 입구라는 간판이 나온다. 거기에서 좌회전해서 5km 쯤 더 가면 진성이씨 종택(宗宅)이 있다.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이 두루 편안하다고 해, 지금은 두루 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의 동남쪽 아늑한 야산을 뒤로 두르고, 작은 개천을 앞에 놓고 펼쳐진 고색창연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모인 곳이 바로 진성이씨의 종가집이다. 대지 760평에 사당과 본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전통 기와 건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당으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경류정(慶流亭)'이 종택의 대표 건물이다. 성종 23년(1492)에 세웠으며 퇴계가 이름을 짓고 액자를 달았다고 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경류정의 바로 앞에는 마치 널직한 이불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뚝향나무 한 그루가 고가의 운치를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둑이나 우물가 등 주로 수분이 많은 곳에 흔히 심는 이 나무는 자람의 모양새가 보통 향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줄기가 비스듬하게 자라거나 여러 개의 줄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키도 크지 않거 가지도 비스듬히 뻗어, 전체 모양이 편평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 뚝향나무는 줄기가 땅에서부터 꽈배기 모양으로 꼬여서 올라가다가 1.3m 높이에서 기괴한 모양의 여러 가지가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사방으로 펼친 가지의 무게를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탓에 16개의 기둥을 세워서 나뭇가지를 받치고 있다. 나무의 키는 불과 3.2m, 가슴 둘레는 2.3m, 가지 펼침은 동서 14.7m, 남북 12.2m 정도이다. 특별히 향이 강해 제사 향으로 애용됐으며 주변에 벌레가 잘 모여들지 않는다고 한다.

 

 


변방에 살다간 자의 넋인 듯

울릉도 통구미 향나무

 

조선 정조 18년(1794)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은 월송만호 한창국을 시켜 울릉도를 조사한 내용을 조정에 보고한다.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정기 조사였다.

 

'4월 21일 배 4척과 80명의 병사를 싣고 출발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한 척을 잃어버리고, 23일경에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 지금의 태하리) 에 상륙했습니다. 산에 올라 살펴보니, 오른편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었습니다. 한 해 걸러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 지고 있었습니다. 24일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았습니다.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 속에 있는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 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해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가 온통 절벽이며, 자라는 나무로는 향나무, 잣나무, 황벽나무, 솔송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 아욱, 쑥, 모시풀, 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향나무 두 토막을 올려보냅니다.'라고 했다.

 

불과 1백여 년 전 구한말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이름 그대로 정말 '숲이 울창한(鬱) 언덕(陵) 섬'이었다. 울릉도 숲의 벌채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다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가 버렸다.

 

 


귀신은 썩 물러가라

창원 신방리 음나무

 

마산과 김해를 잇는 4차선 국도 14호선의 중간쯤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로 올라가는 1,015호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거기서 약 2km쯤 북으로 올라가면 왼편에 신방초등학교가 있고, 음나무는 학교 뒤 편 도로와 인접한 야산의 산비탈에 자란다. 음나무와 엄나무 양쪽을 다 쓰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음나무다. 엄나무란 가시가 날카롭게 달려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음나무는 원래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는 '벽사(辟邪)나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음나무 가지를 방 문 문설주나 대문 위에 걸어두고 잡귀를 쫒아내고자 했다. 험상궂게 가시가 듬성듬성 나 있는 음나무 가지를 귀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저승사자가 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고 다니듯이 잡귀도 도포를 입고 다닌다고 상상한듯 하다. 음나무 가시는 도포 입은 귀신이 신경 쓰이는 부분, 즉 도포자락을 걷어 올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 좋아할 이 없다. 귀신이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신이 싫어하는 나무에는 음나무를 비롯해 무환자나무, 복사나무 등이 있다. 반대로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에는 느티나무 등의 정자나무와 버드나무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자라는 4그루의 음나무 고목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키 15.4~9.1m, 가슴높이 둘레 3.2~3.7m의 범위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 15.6~13.2m, 남북 11.2~18.1 정도이며 서로 가지가 맞닿아 있다. 자람 터의 경사가 너무 급해 비가 올 때마다 흙이 흘러내려 붉은 황토가 드러난 상태로 있다. 최근 여러 가지 조치를 했지만, 큰 비가 오고나면 여전히 땅이 패일 정도로 척박하다. 그러나 나무는 잘 버티고 있다.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의 백성 사랑

하동 송림

 

남해 노량에서 출발한 황포돛대를 매단 장삿배는 섬진강을 따라 올라왔다. 풍부한 물산이 모여드는 하동장에서 한 몫을 단단히 잡고 다음날이면 '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화개장터'에서 80리 하동포구 장삿길을 마감했다.

 

당시로서야 고달픈 생활전선의 길고 긴 뱃길이었지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낭만과 꿈이 있는 물길이었다. 이 길의 한 가운데, 하동읍을 감아도는 섬진강가의 넓은 백사장을 따라 띠처럼 이어진 송림(松林)이 있다. 국내 최대의 이 토종 소나무숲은 조선 영조21년 당시 하동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처음 조성했다. 그는 민초들의 아픔을 아는 목민관이었다. 처음 부임한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섬진강의 모래톱과 푸른 강물이었다. 이곳을 다스려야 하동읍이 편안해지리라는 것을 아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막대한 품이 드는 흙과 돌 제방만이 물길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친화적인 제방을 만들자고 외쳤을 터이다. 이렇게 시작한 솔숲 만들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때 1천 5백 그루에 이르렀다. 지금도 50~300년생의 9백여 그루가 너비 30여m, 길이 2km에 이르는 푸른 띠를 만들고 있다.

 

송림은 멀리 광양만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을 막고, 홍수로 넘어오는 물을 막아자누느 다목적 숲이었다. 개개의 소나무는 소년나무와 노인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생태적인 안정성'이 뛰어나다. 또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듯 구부러지고, 비틀어지고, 때로는 서로 기대기까지 한 나무의 모습들은 전체적으로 평안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백사청송(白沙靑松)이란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아름다운 솔숲이 됐다.

 

 


 

 

김훈 / 자전거 여행

오늘의 책 2013. 2. 2. 11:53 Posted by 따시쿵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여수의 남쪽, 돌산도 해안선에 동백이 피었다. 산수유도 피고 매화도 피었다. 자전거는 길 위에서 겨울을 났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 지나오고 나도, 지난온 길들이 아직도 거기에 그렇게 뻗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길은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할 새로운 길이다. 겨우내 끌고 다니던 월동장구를 모두 다 버렸다. 방한복, 장갑, 털양말도 다 벗어버렸다. 몸이 가벼워지면 길은 더 멀어 보인다. 티셔츠 차림으로 꽃피는 남쪽 바다 해안선을 따라 달릴 때, 온몸의 숨구멍이 바람 속에서 열렸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서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았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작기 피어나고, 제작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돌산도 율림리 정미자 씨 집 마당에 매화가 피었다. 1월 중순에 눈 속에서 봉우리가 맺혔고, 이제 활짝 피었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도산서원과 안동 하회 마을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의 존영과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지금 천 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退溪)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경북 안동(安東)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그 오래되고 자존에 가득 찬 유림(儒林)의 고장은 두텁고도 다양한 문화의 층위를 축적해 왔는데,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유(儒)와 무(巫), 강(江)과 산(山), 학문과 생업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낸 하회(河回) 마을과 또 안동 김, 안동 권, 진성 이, 의성  김, 풍산 류, 예천 권, 풍양 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유림 영남학파 오랜 세거지들이 위엄과 자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퇴계는 그 절정이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부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이 오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퇴계는 70세에 이루어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 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낙동강 상류의 물가에 배움의 공간을  건설하려는 퇴계의 노력은 40대 이후 계속되었다. 퇴계는 46세 때 이 물가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고, 50세 때 한서암(寒栖庵)을 지었으며,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는 흐르는 물가에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身退安愚分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니 늙으막에 근심이 되는구나.

溪上始定居   시내 가에 비로소 살 곳을 정하니      
臨流日有省   강물에 임하여 날마다 성찰이 있으리

 

 

이 물가의 배움터에서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써서 한양의 임금에게 보내야 했다. 그의 연보는 한 해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임명과 불취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70세로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까지도 벼슬을 거두어주기를 요구하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보냈다. 그의 사직은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임금의 명을 거듭 물리치기 민만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주막에서조차 그는 사직서를 써서 인편에 보냈다.

 

사직서만이 이미 인의(仁義)를 저버린 정치 현실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초야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장연의 맹목적인 아음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도산서당의 그 염결하고도 단순한 구도는 퇴계의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를 집약하고 있고, 모든 아름다움을 인간과의 관계 위에서만 긍정한 그의 미의식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구조는 맞배지붕에 홀처마이다.

조용헌의 백가기행 百家紀行

오늘의 책 2012. 12. 29. 12:58 Posted by 따시쿵

집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집들은 공간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며, 집 그 자체가 인생철학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책 『조용헌의 백가기행』. 현대 우리 사회의 '집'이란 재산적 가치가 크다. 부동산 값의 상승과 하락에 사람들이 웃고 울고,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는 이 시점에 저자는 재산과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원래 집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집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인 ‘가내구원(家內救援)’을 집의 가치로 꼽으며 축령산 자락에 자리한 한 칸 오두막집에서부터 차는 풍류가 아니라 혁명이라 말하는 부산 달맞이고개의 다실 이기정까지,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의 눈으로 바라본 '집'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시대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위로와 휴식은 집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갖추어야 장치로 '다실'과 '정원', 그리고 '구들장'을 가내구원의 조건을 꼽는다. 이 세가지 조건의 의미를 21채의 집을 통해 설명하며 저자는 우리 시대 집의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고 열린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이끌고 있다.

 

조용헌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민속학을 전공하여 불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무 살 무렵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의 사찰과 고택을 답사하며 수많은 기인, 달사들과 교류를 가져왔다. 이들 재야 고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 지리, 인사에 관한 동양강호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해왔으며, 동양적 전통 이데올로기를 통해 서구적 가치관에 함몰되어가는 한국의 문화적 미와 전통을 복원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현재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다.

 

조용헌은 원광대 불교대학원 교수이자 사주명리학 연구가이다. 사주를 미신으로만 생각하던 통념에서 교수가 사주명리학을 연구한다는 것만으로도 혁신이었다. 대학시절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는 취미로 산 타는 것을 즐기다가 절을 다니게 되었고, 스님들과 가까워지며, 한의학, 풍수, 사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주를 맞추는 스님들에게서 신기함을 느꼈고, 그 호기심이 그를 사주명리학으로 이끌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사주명리학은 도교의 방사(方士=도사)들이 오래 살기 위해 자연의 흐름에 인간을 순응시키는 방법을 찾자는 수련체계였다. 밤과 낮이 음양으로, 사계절이 오행으로, 여름과 가을 사이 정 가운데에 자연의 중심이 되는 흙(토)을 넣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주 풍수 한의학 전문가를 찾아서 잡과라는 과거를 둘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었으나 점차 대중화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자리잡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사주명리학이 가진 상상력이 한국의 미래 문화콘텐츠 사업을 이끌어갈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 속에 가득 담긴 한국인들의 독특한 상상력이 바로 세계시장의 승부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주명리학과 풍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서구인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따라가는 현 세태를 비판한다. 서구인들이 무속이 아름답다고 하니, 무속연구를 하고, 탱화가 아름답다고 하니 탱화 연구를 하는 한 발 느린 미의 발견이 아닌, 현상 그대로의 미를 발견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찰기행 이나 잊혀져있던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을 통하여 미와 전통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책들은 20년이라는 그의 지난 세월, 그가 무수히 올랐던 산과 한국을 담고 있기에 더욱 공감이 된다. 또한 천문, 지리, 인사(人事)로 대표되는 삼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가득한 저자의 손길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고, 서구적인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 우리 조상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는 지금도 지난 18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고택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들을 만나며 천문, 지리, 인사에 관한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차는 풍류가 아닌 혁명이다

 

부산 달맞이 고개의 다실, 이기정 二旗亭

 

한국의 상류층은 너무 바쁘다. 저녁 시간에도 약속을 2~3개씩 잡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바쁘면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얕아지는 것이다. 얕아진다는 것은 결국 품질이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가 있는가? 나는 세 가지를 꼽는다. 집 안에 세 가지를 갖추고 싶다. 첫째는 다실 茶室이고, 둘째는 중정 中庭이요, 셋째는 구들장이다. 실내에다 정원 또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놓으면 중정이 된다. 중정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풍경을 관망할 수 있다. 바깥 경치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풍경을 본다는 것이 중정의 장점이다. 그 다음에는 구들장이다. 피로는 등 쪽의 신경과 근육이 굳는 것이다. 이 등쪽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장치가 바로 절절 끓는 구들장이다. 끓는 구들장에서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풀린다. 그 다음에는 다실이다. 다실은 왜 필요한가?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받기 위해서다. 집 밖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집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해 주는 장치가 다실이다. 21세기에는 과학적 진리에 의해서 종교적 신념이 해제된 시대다. 다실은 현대인이 집 안에서 신성 神聖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부산의 달맞이고개에 있는 이기정 二旗亭은 한국적인 다실의 한 예를 보여준다.

 

달맞이고개는 특이한 곳이다. 해운대 바로 옆이다. 도심에서 툭 터진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도심에서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이기정을 계획한 고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수가 없었다. 해볼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차 茶를 좋아했다. 다방을 해야겠다 싶어 부산 시내에 소화방 素化房이라는 다방을 차렸다. 다방은 물장사에 속한다. 물장사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하루에 수백 개의 찻잔을 수건으로 닦는 일이 주된 일과였다. 그 찻잔을 닦으면서 내면을 응시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 차에 몰두하게 되었고, 다법 茶法의 세계로 나아갔다. 다법은 차를 마시는 의례를 가리킨다. 다례 茶禮와 같은 말이다. 우리말에 '차례 지낸다'는 말은 남아 있지만, 그 차례는 중간에 실전 失傳되었다. 그런데 고명은 이 실전된 다례(차례)를 복구하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것이다. 우선 일본의 다례(차례)를 참고했다. 일본의 다례도 따지고 보면 백제에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중심부에서 없어진 것이 주변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다례가 바로 이러한 경우다. 고명은 일본의 다례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다법을 가다듬어 나갔다. 그 다법이 1백2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다법을 행하려면 대략 30분에서 1시간이 걸린다. 다법을 행하는 동안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다법을 행하다 보면 일단 그 동작들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딴생각을 하면 다법을 따라갈 수 없다.

 

 

풍류와 실용이 가득한 집

 

논산 명재고택 明齋古宅

 

명재고택의 숨은 그림은 석가산에 있다. 석가산 石假山은 인공으로 조성해 놓은 조그만 돌산을 가리킨다. 서양의 정원에는 없는, 하지만 동양의 조경 전통에서는 아주 중시했던 포인트가 석가산이다. 동양의 식자층들은 입산수도 入山修道를 하고 싶어했다. 몸은 세간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산을 그리워했다. 그렇지만 먹고사느라고 산에 갈 수 없으니까, 집 안에 산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정원에 있는 석사산을 보면서 등산 욕구를 대리 충족했다고나 할까. 명재고택 바깥 사랑채 마루 밑에는 검은색을 띤 높이 30cm 크기의 돌들이 땅에 박혀 있다. 어떻게 보면 수석 무더기를 박아 놓은 것 같다. 바로 금강산을 상징하는 석가산이다. 금강산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사랑채에 앉아서 마루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금강산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재고택 사랑채는 금강산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주인은 가정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위에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금강산 아래쪽 마당에도 돌무더기가 쭉 이어져 있다. 언뜻 보기에는 화단을 둘러싼 돌로 보인다. 이 돌들은 무산십비봉을 상징한다. 중국에 있는 산 이름으로 한자 문화권의 시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한 산이 무산십이봉 巫山十二峰 이다. 중국 양쯔강을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협곡이 나온다.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은 여기에 비하면 족탈불급 足脫不及이다.

 

 

보통 사람의 토종  정원

 

나주 죽설헌 竹雪軒

 

유현함의 그늘을 제공하는 좌탱자 우꽝꽝을 통과해 좌측으로 꺾으면 살림채인 단층 벽동집이 나온다. 서민이 대출받아 지은 단출한 집이다. 거실에 들어서면 마룻바닥이 질박하다. 폐교된 교실의 마룻바닥을 가져다가 사포로 다듬은 것이다. 마루 끝에는 검은색 벽난로가 실내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주고 있다. 거실 옆방은 한쪽 벽면이 온통 투명한 유리다. 유리 밖으로는 시퍼런 몸통을 지낸 왕대가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달력 그림처럼 보인다. 선비는 대나무를 보아야만 속기 俗氣를 턴다고 했던가! 대나무를 사철 잎사귀가 푸르고,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댓잎에서 흔들리는 소리가 빗소리 같기도 핟. 그리고 대숲에 들어가면 서늘한 느낌이 있다. 이 서늘한 느낌이 삶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인 과열을 내려주는 작용을 한다. 실제로 이 집은 나주와 광주 일대의 강호제현들이 수시로 모여서 시서화 詩書畫를 논하고, 문사철 文史哲을 이야기하며 노는 아카데미이자 살롱이다. 이렇게 서로 모여 놀아야만 중년에 직면하는 늙음과 병과 죽음의 근심을 다소나마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생과 걱정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대숲의 반대쪽으로는 노란 창포 밭이 널려 있다. 500평 가량 되는 노란 창포 밭은 5월이 한창이다. 5월의 밤에 이 창포 밭 앞에 서 있으면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반쯤은 알게 된다. 달밤에 비치는 달빛과 노란 창포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다.

 

 

소박하되 품격이 있는 선비의 집

 

진주 석가현 夕佳軒

 

 

피파온라인3 드디어 오픈베타 출시!!

축구와 야구 2012. 12. 24. 18:4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넥슨에서 만든 피파온라인3(줄여서 피온3)가 2012년 12월 18일 오픈베타를 드디어 실시하였다. 오픈베타를 실시한 날에는 무려 10만명이 몰리면서 게임을 하다가도 튕기면서 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그 중에 나도 한 명 ㅋㅋㅋㅋ) 12월 18일에는 피온3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한꺼번에 몰리니까 넥슨에서 피온3에 점검을 막 2시간씩 하였다. 그래서 못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만큼의 불편을 끼치는 만큼 또 그만큼의 재미를 선사하여 주었다. 

첫번째, 해설은 요즈음 뜨고 있는 '배성재 캐스터' 와'박문성 해설위원'이 목소리를 녹음하셔서 게임을 하는동안 지루할 틈을 안준다. 

(출처 : 네이버 뉴스)

두번째, 웬만한 온라인 축구게임 그래픽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실감난다. CD게임 못지않다.

세번째, 축구선수들이 피온2와는 다르게 실제선수와 같은 모션을 하고 있다.

(출처 : THIS IS GAME.COM)

피파온라인2가 3월달에 서비스를 종료한다.(망한다.ㅋㅋㅋ) 그러니 피파온라인2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년1월까지만 하고 피파온라인3로 갈아타길 바란다.

-끝~-

 

이형기 - 낙화

좋은 글귀 2012. 12. 16. 18:18 Posted by 따시쿵

 

 


낙 화

 

                 이 형 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은 1950년 시 [비 오는 날]을 잡지 <문예>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살. 최연소 등단 기록이었다. "시란 본질적으로 구축해 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야. 시에 절대적 가치란 없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팔자를 타고난 놈들이 시인이야. 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말이야" 그는 시 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 수필 등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인 창작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자연 서정을 선보였으나 현대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시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한국 시사에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였다.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말했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병석에 있으면서도 아내의 대필로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는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아포리즘을 남겼다. "슬퍼할 수밖에는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때는 슬퍼해 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은 그 차제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꽃의 낙화에는 만행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이 있다.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요사도 구차도 없다. 아쉬움이 없을 이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제때에 따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다.

 

새잎이 돋고,줄기가 힘차게 뻗고, 꽃이 벙글고, 꽃벌이 꽃의 외곽을 맴돌고, 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 지고, 꽃의 시간을 구구절절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큰 운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부귀는 빈천으로 바뀌고, 만남은 이별로 바뀌고, 건강은 늙고 죽음을 초래한다. 시시각각 바뀐다. 그래서 이런 것에는 견실성이 없다. 견실성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못 된다. 이형기 시인의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집착 없음과 아름다운 물너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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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풀

좋은 글귀 2012. 12. 16. 18:01 Posted by 따시쿵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는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맞으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꺽임이 없는 '둥근  곡선'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우리는 날마다 새날을 받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픔과 어제의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은, 일어서고 있다는 믿은, 넓고 큰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짐작과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풀]은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시는 사람들 가슴속에 눕고 울고 일어서며 푸르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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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효시로 우리 문단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국 현대시가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1월 1일부터 5월 4일까지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라는 타이틀 아래 정리되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00명의 시인들이 시를 추천했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입에 착착 붙는 다양한 시들이 소개되었다. 김소월, 한용운부터 김수영, 기형도를 거쳐 안현미, 김경주 같은 젊은 시인들의 시를 나란히 수록한 참신한 구성에, 정끝별·문태준 시인의 깊이와 재미를 아우르는 맛깔스러운 해설과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권신아·잠산의 감각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시의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전통적인 애송시와 함께 최근 발표된 시들이 맛깔스러운 여러 즐거움들과 함께 골고루 포함돼 있기 때문에 풍성함과 신선한 느낌을 함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를 살면서 마음 한구석 무언가 텅 빈 느낌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채워주는 정신의 ‘일용할 양식’과 같은 잠언집. 


작가 정채봉은 생전에 ‘어른을 위한 동화’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동심과 사랑, 자연, 나눔 등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어린이의 때 묻지 않은 맑은 시선을 통해 현대인의 은밀한 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기도 하고, 삶에서의 희로애락을 섬세한 시선으로 함축적으로 표현해내기도 했다.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동화적인 감성으로 철학적인 내용을 풀어냄으로써 모든 사물과 세상, 그리고 인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주는 명상잠언집이다. 그가 남긴 어떤 작품집보다도 그의 시적인 감성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집이기도 하다. 


우리들 각각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을 콕 꼬집어 냈는가 하면,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올바른 가치관을 우화적으로 표현해 지금의 내 모습과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또한 곤란과 갈등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되는 지혜와 단순하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정의와 진리도 담겨 있다. 


이 책은 마치 『탈무드』를 읽는 것처럼 쉽게 읽히면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깨달음을 주기에, 초등학생부터 2,30대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을 사는 지혜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작가 정채봉의 맑은 눈망울 속에서 깨끗하게 씻겨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4년 나온 동제의 책의 개정판에 해당한다.



정채봉(丁埰琫)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동화라는 창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환기시켜 주었던 아동문학가.


1946년 전남 승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위를 나는 새, 바다, 학교, 나무, 꽃 등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꽃다발」로 당선의 영예를 안고 등단했다.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화상(1986), 한국 불교아동문학상(1989),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2),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했다. 


깊은 울림이 있는 문체로 어른들의 심금을 울리는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만들어 냈으며 한국 동화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마해송, 이원수로 이어지는 아동 문학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모교인 동국대, 문학아카데미,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 등을 통해 숱한 후학을 길러 온 교육자이기도 했다. 동화 작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죽음의 길에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고,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평생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맑게 살았던 정채봉은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과 생명을 대하는 겸손함을 글로 남긴 채 2001년 1월,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편 우리에게 동화 작가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남긴 작품은 동화라는 제한적이고 규정적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놀라운 창작열로 소설과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유례를 찾기 힘든 문학적 향취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 문학사에서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동화의 독자를 어린이들로 한정하지 않고 성인들로 확장했다. 사실 동화 속에 담긴 메시지, 즉 순수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겨냥해야 하는 이들은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들이다. 많은 작가 외에도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님, 김수환 추기경님 등 여러 종교인들과 오랜 기간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


정채봉은 각박하고 흉흉한 세상살이를 겪는 동안 사람들은 애초에 지녔던 동심의 순수한 영혼을 잃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글로써 이들의 박토처럼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쓰게 된 것이 바로 ‘성인 동화’이다. 정채봉의 생각처럼, 어른들은 성인 동화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망실된 동심과 순수를 깨닫고 자신을 성찰하고 수굿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2010년 건립된 순천문학관에는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정채봉관이 마련되어 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

윗독수리로부터 할큄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들은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의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아 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친 상흔이 나타났다.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독수리한테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뿐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내 자리에서 찾은 행복


올해 열두 살 난 소년 가장 수기를 읽었지요.

이 소년은 10년 전 뺑소니 교통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병시중을 혼자 들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사고가 난 후 곧바로 집을 나가 버렸고,

할아버지도 3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병원비 백만 원을 이 소년에게 짐 지워 놓았다는군요.


이 소년의 하루 일과는 이렇습니다.

새벽 4시, 사발 시계의 소리에 일어나서 신문 보급소행.

배달을 마치고 7시쯤에 돌아와서 밥을 지어 서둘러

아버지와 밥을 먹고 아버지 점심상을 봐둔 다음에 학교로.

이 소년의 점심은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준비해 준 도시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점심 도시락에 좀 다른 반찬이 있으면 몰래 덜어내

비밀봉지에 싸서 책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이 소년이 집에 돌아와서 하는 첫번째 일은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의

욕창 소독과 대소변 처리이며, 3일에 한 번씩은 관장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누워서 해 놓은 신발 밑창을 오리는 일거리를 

공장에 가져다 주고 새로 받아온 다음, 빨래하고, 청소하고, 저녁밥을 짓

는다고 합니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기시면서 남겨 놓은

새마을금고의 1백만 원 빚도 두 번만 넣으면 끝난다고 좋아합니다.


이 소년의 하루 가운데 가장 즐거운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남겨 온 반찬, 이웃집 아줌마가 담가 준 김치 그리고 콩나물국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이 순간의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증금 30만 원에 월 4만 원씩의 사글세 방에 사는 이 소년 가장의 수기는

놀랍게도 이런 글귀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용기가 있다. 만일 풍족한 생활

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면 지금의 이 작은 행복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

다. 이처럼 작은 행복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나에게 괴로

움과 힘을 함께 주었기 때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