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 새벽을 깨우리로다

오늘의 책 2013. 11. 23. 10:05 Posted by 따시쿵

저자 : 김진홍


1941년 경북 청송 출생. 계명대학교 철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계명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미국 킹칼리지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창립하고 판자촌 철거계획이 발표되자 남양만으로 이주, 두레마을을 설립했다. 지금은 1999년 창립한 구리 두레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지리산에 있는 두레마을 대표로 섬기고 있다.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고난을 이기는 열두 달》, 《성서한국.통일한국.선교한국》(이상 두레시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전3권, 한길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으며, 대표 저서인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안수현 / 그 청년 바보의사

오늘의 책 2013. 11. 23. 10:02 Posted by 따시쿵

안수현

 

1972년 1월17일에 태어났다. 1991년 고려대 의학과에 입학하여 고려대 의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의학과(석사 수료, 박사 과정)를 졸업했다. 이후 내과 전문의로 일하며, '예흔' 리더, 한국누가회(CMF), 영락교회 청년 3부 / 의료선교부, 28사단 사단의무대 군의관. 프리랜서 praise&worship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단정하게 깍은 머리에 105사이즈의 흰색 폴로셔츠, 푸른색 바지를 즐겨 입던 178cm의 듬직한 체구였던 청년의사는 환자들에게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다. 그는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며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참 의사'였다. 환자들에게는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으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청년 의사. 의대생 시절부터 ‘스티그마’라는 아이디로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썼으며, 해박한 지식과 올곧은 신앙의 자세가 드러난 글들은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4년에는 <청년의사> 주최 ‘한미수필문학상’ 공모에서 “개입”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2003년 28사단 사단의무대 군의관으로 입대한 청년의사는 2006년 1월 5일, 예수님의 흔적을 좇아 달려가던 서른 셋의 나이에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고집으로 《그 청년 바보의사》와 《그 청년 바보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이 있다.

 

 

 

이정록 - 더딘 사랑

좋은 글귀 2013. 11. 7. 11:58 Posted by 따시쿵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좋은 글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 - 그 사람을 가졌는가  (0) 2014.02.28
박노해 - 굽이 돌아가는 길  (0) 2013.12.26
천상병 - 장마  (0) 2013.06.19
손석희 - 지각인생  (0) 2013.05.10
정지원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0) 2013.04.25

토저 마이티 / 이것이 성공이다

오늘의 책 2013. 10. 28. 08:08 Posted by 따시쿵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목사이자 저술가였다. 18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버그에서 태어났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1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 교회에서 44년간 목회를 했고, 그 중 31년을 시카고의 '남부 동맹 교회'에서 시무했다.


경건시와 신비주의적인 찬송, 에머슨과 셰익스피어의 글을 좋아한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풍성하고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절충하여 타협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이나 십자가 없는 성공 처세술을 전하는 것은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나님을 추구함』,『경건 생활의 기초』,『패배를 통한 승리』,『하나님을 바로 알자』『거듭난 자의 생활』,『경건 생활의 기초』,『경건 생활의 비결』,『예수 방향으로 가라』등이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을 하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는 '이 시대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제약을 지니게 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이 시대정신에 물들지 않을 수 없다. 탐욕에 기반을 둔 무한경쟁의 살벌한 정글 법칙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세뇌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야망 실현을 '비전'의 미명으로 정당화하고 기도응답으로 호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의 출세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추구한다는 출세 방식 사이에 과연 다른 점이 있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양이 이리를 벤치마킹하여, 자신의 발톱을 날카롭게 기르고 송곳니를 부지런히 숫돌에 갈아 드라큘라의 이빨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기형(奇形) 양이 되면 이리를 이길 수 있는가? 오히려 달아나는 데 지장을 초래하여 더 빨리 잡아먹히고 만다. 양으로 부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리)의 성공법칙으로 무장하는 것이 바로 이 기형의 웃기는 양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하나님은 이리의 방식이 아니라 양의 방식으로 평천하(平天下)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니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食物)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聖山)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5:25).

 

토저는 이 책에서 바로 양의 이러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성공 방식에 대해 천명하고 있다. 이 시대의 선지자 토저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찬 메시지를 들어보라!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

 

 

 

예수님을 알기 위해 지불할 대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름답고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는 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땨문에 그들은 그렇고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악한 것들을 삼가는 것으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다. 더러운 것, 해로운 것, 추잡한 것을 삼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음란하고 죄악된 것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소극적으로 어떤 것들을 섬기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끝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유감그럽게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나쁜 것들'뿐만 아니라 '좋은 것들'도 버렸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라고 말했다. 본래 그의 권리에 속하는 것, 그에게 유익이 되는 것, "누가 뭐래도 이것은 내 것이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내가 이것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는 기꺼이 포기했다. 바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말이다.

 

"나는 내게 좋은 것들까지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지혜와 아름다움과 진리와 영생의 근원이요 샘이시다. 그분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버리지 못하고 집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평안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적 평안을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늘 고난에 노출되었으며, 심지어는 3주 동안 밤낮 풍랑에 밀려 바다를 떠돌기도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어떤 것에도, 심지어 우리의 목숨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에 집착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보화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즐거운 삶에 악세서리처럼 첨가되어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매력에 무한히 빠져들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바울은 지금으로 말하면 박사 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많은 학식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고백을 들어보자!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똑똑히 기억하라. 왕족이든 사대부 집안이든 모든 혈통은 부패했다는 것을! 나는 귀족 출신이든 빈민굴 출신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 지식, 외모, 능력을 자랑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성공'과 '출세'라고 생각한다. 정신 차리라.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고작해야 현대의 기독교는 "도박을 하지 마라. 안 그러면 패가망신할 것이다. 술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노숙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나는 이런저런 저질스러운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나는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그런 것들을 끊을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양심적 유대인으로 살아온 그가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 술을 끊었습니다."라고 간증하는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귀한 간증이요, 선한 일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기본적인 것에 머물면서 "나는 이런저런 것을 하지 않는다"라고 자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처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폿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라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홀로 거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건강과 생명까지 주님께 드려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건강을 주님께 바쳤다. 내가 나의 사명을 다 완수했다면, 내가 굳이 이 헛된 세상에 더 머물 이유가 무어이겠는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어찌하여 늦가을의 마지막 잎새처럼 처량하게 매달려 있어야 하겠는가?

 

당신의 건강을 주님께 드려라. 그리고 당신의 생명마저도 드려라. 사람들은 주님께 그들의 생명을 드리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아는 한 목회자가 있는데, 의사가 그에게 "당신에게 협심증이 생겼습니다. 잘 관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훌쩍이더니 캘리포니아로 가서 은퇴하였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목회자가 있는데, 그 역시 협심증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괜찮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말한 후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의 아내가 일어나 그를 깨우려고 했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떠난 자리에는 미남(美男)이며 키가 큰 그의 육신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호흡까지 주님께 드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는 말대로 살다가 죽었다.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았다. 그는 "죽기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은 의연(毅然)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라.

 

당신의 날이 얼마나 길어질이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을 주셨다. 첫 째는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6 하)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하)라는 말씀이 있다.나는 이 두 말씀에 의지하여 이제까지 살아왔다.

 

 

순교를 자청한 그리스도인

 

나의 이런 교훈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런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사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저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가는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 가려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주님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지 말라. 주님은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을 때 그분은 그것을 다시 돌려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좋은 예가 스탬 선교사 부부의 경우이다. 존 스탬(John Stam)과 베티 스탬(Betty Stam)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은 나 부부를 야외로 끌고 나가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선교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소."

"그래? 그러면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어라."

스탬 부부는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었고, 날카로운 칼이 그들의 목을 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마이더스(Midas)와 세상의 모든 왕들과 모든 구두쇠들보다 더 부유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도인들이 박해당하여 죽었던 로마 시대의 일이다. 한 성도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고 싶은 열망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주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입니다. 나는 주님께 내 목숨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면류관들 위에 이 '순교의 면류관'을 올려놓고 싶습니다. 나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개입한다면 나는 순교를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제발 개입하지 말아주십시오. 권세자를 찾아가서 선처를 호소하지 마십시오. 나는 늙은 사람이며,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내가 이 '순교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이 성도의 친구들은 개입하지 않았고, 로마 당국은 사형을 집행했다. 감사하게도, 결국 이 신앙의 위인은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영적 거인(巨人)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위대한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주(主)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나의 나라는 사라지고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간절한 소원이 그 비결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내 마음속의 보좌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세 가지 준칙

 

인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인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완고한 세대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 그들은 장차 도래할 세상의 멸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헌 사람들은 조언(助言)을 원할 것이고, 나는 바로 그 조언을 해주고 싶다. 완전한 사람의 조언은 아니다. 다만 이런 사람들을 돕겠다는 일념(一念)을 가진 사람의 조언이요, 오랜 세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다.

 

당신은 이 완고한 세대에서 구출 받기를 원하는가?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이 허망한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의 삶을 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를 행하라.

 

첫째,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말하라.

둘째, 육신을 억제하라.

셋째, 단순하게 살아라.

 

이것은 다음 성경 구정들의 교훈이기도 하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廣大)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라.....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5, 22)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3)

 

 

내게 송곳을 주신 하나님

 

몇 년 전 하나님은 내게 날카로운 송곳을 주시면서 "아들아, 교만하게 부풀어 오른 네 자아(自我)에 구멍을 내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송곳으로 내 자아를 찔렀으며, 바람이 '쉿' 소리를 내며 내 자아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불평의 소리가 들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과대 포장되어 부풀어 올랐던 내가 본래의 나 자신으로 작아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과대 포장된 자아를 훌훌 벗어버리는 것이 즐거웠다.

 

젊었을 때 나는 총 쏘기를 아주 즐겼다. 22구경 회전식 연발 권총을 즐겨 사용했다. 한가한 시간에 재미 삼아 친구와 함께 야외로 나가 표적을 만들어놓고 총을 쏘았다. 우리는 그 표적을 '진흙 닭'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진흙을 닭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가 그것에 깃털들을 많이 꽂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우리가 깃털을 꼿꼿이 세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로는 얼마나 작은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과대 포장되어 있는가!

 

명심하라. 허세적(虛勢的)인 깃털들을 다 뽑아버리고 본래의 크기로 작아지지 않는 한 결코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신 자신을 부인하라.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어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이 당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믿어라. 그리고 이 믿음대로 살라.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원한과 분노가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화를 잘 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노라고 자랑한다. 그들은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이며 완전히 속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죽일 것이며,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도 기쁨도 열매도 유익도 승리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진홍 / 새벽을 깨우리로다  (0) 2013.11.23
안수현 / 그 청년 바보의사  (0) 2013.11.23
존 스토트 / 산상수훈  (0) 2013.10.28
역사 e: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0) 2013.10.05
김훈 / 칼의 노래  (0) 2013.10.04

존 스토트 / 산상수훈

오늘의 책 2013. 10. 28. 08:04 Posted by 따시쿵

John Robert Walmsley Stott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요 저술가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로 30여 년 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을 입안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을 적극 주도해 왔다. 런던 현대 기독교 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쳐 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광범위한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설립한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펴 나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라 칭했고, 전기 작가 존 폴락은 "사실상 전세계 복음주의의 신학적 리더"라고 했다. 2005년 "타임(Time)"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한바 있다.


구십 평생 제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2011년 7월 27일 오후 3시 15분 런던 바나바 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다.






역사 e: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오늘의 책 2013. 10. 5. 12:08 Posted by 따시쿵

저 : EBS 역사채널ⓔ


EBS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기획한 프로그램으로 5분 분량의 강렬한 메시지와 세련된 영상을 통해 한국사의 주요 사건이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에 기획편성되어 일주일에 한 편씩 방영되며, 영상과 메시지를 통해 우리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학부모, 교사, 청소년 등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어떤 젊음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급하게 몰아가는데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 할 것인가."

 

 

어느 양반가의 망명길

 

1910년 12월 30일 밤, 한 무리가 어둠을 뚫고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젖먹이부터 60대까지 섞인 기다란 행렬은 국경을 지키는 일본 감시병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향했다. 한 해가 막 저무는 야밤, 이들이 북풍이 몰아치는 살벌한 국경선을 넘어야 했던 사정은 무엇일까?

 

이들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집안일을 돕던 식솔들로 그 수가 무려 60여 명에 이르렀다. 이유승의 여섯 아들은 서울 장안에서 우애 좋기로 유명했다. 첫째 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 넷째 회영, 다섯째 시영, 여섯째 호영, 이들이 12월 어느 날 함게 모인 자리에서 넷째 회영은 형제들에게 호소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나라가 망하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형제들은 우당 이회영의 말에 따라서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정한다. 여섯 형제의 뜨거운 결의는 향후 30여년간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됐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우당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경술국치가 잇던 1910년 당시,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다.

 

 

무장독립투쟁의 씨앗,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우당은 여섯 형제 가운데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호방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의 현실은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었다. 30대부터 항일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농장을 경영했던 우당은 40대 중반에 들어선 1905년 가을,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으로 한국의 외교원을 금지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항의했다. 젊은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함께 해 온 이상설, 동생 이시영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대한제국은 109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2년 뒤에는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더이상 활동을 펼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우당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찾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이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우당은 나라 밖 상황에 주목했다. 우선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해 국원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고종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특사로 추천했다.

 


 

100년 만의 귀환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

 

1592년 임진왜란

함경도 일대에서 벌어진 최대 육상전

북관대첩

 

단 한 번도 진 저기 없는

'전쟁의 신' 가토 기오마사 부대

2만 2천여 명

VS.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

200명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패퇴한 왜군

 

1905년 러일전쟁

북진하던 일본군은

함경북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

 

비석은 강제로 떼어져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무거운 머릿돌로 눌린 후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된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드라마 같은 이야기

 

400년 전 온 나라가 전쟁으로 파탄에 빠졌을 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용감한 이들이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잊었다. 100여 년 뒤인 1707년 그들의 이야기를 한 후손이 돌에 새겼다. 그 뒤 돌에 새긴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역사에 묻혔다. 세월이 지난 후 역사에 묻혀 있던 돌은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파란만장의 돌은 우여곡절 많았던 사나이들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바로 북관대첩비의 이야기다. 북관대첩비의 정식 이름은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북관대첩비는 말 그대로 북관(北關)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북관은 오늘날의 함경도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크게 무찌른 일을 기념해 숙종 35년(1709년)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이다. 높이 187센티미터, 너비 66센티미터, 두께 13센티미터의 비석에는 150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병장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비석을 세운 이는 정육품인 함경도 북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로 부임한 최창대였다.

 

북관대첩비의 운명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편으 드라마처럼 기구하다. 왜 비석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세워질 수 있었을까?

 

1592년 4월 중순,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논란 선조는 4월 30일 피난에 나섰고 한양은 5월 2일, 2개월 만인 6월 14일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되었다. 날이 더워질수록 일본 군사들의 사기는 올라가는 듯했다.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스물여덟 살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민의에 부응해 그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함경도의 의병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남쪽의 왜군과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북쪽의 여진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정문부를 비롯한 북관의 의병들은 1592년 9월부터 반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의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겨준 역적들을 소탕했고, 경성, 임명, 단천, 백탑교에서 여덟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해 함경도에서 몰아냈다. 하급 무관이 이끈 200여 명 의병부대가 명장 지휘하의 2만 명 정예부대를 크게 깨부순 것이다.  

'오늘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저 마이티 / 이것이 성공이다  (0) 2013.10.28
존 스토트 / 산상수훈  (0) 2013.10.28
김훈 / 칼의 노래  (0) 2013.10.0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13.05.28
김훈 / 자전거 여행2  (0) 2013.02.16

김훈 / 칼의 노래

오늘의 책 2013. 10. 4. 13:43 Posted by 따시쿵

김훈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기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 없는 수영을 밝고 지나갔다. 그래 가을에 해남, 강진,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경상 해안 쪽 추수는 적들이 몰아갔다. 적들은 여수, 순천 너머에 포진했고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들은 연안 육지의 성 안에 군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직 적의 군량을 빼앗기 위한 전투를 궁리해 보았으나 적의 육지 요새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없었고 수군을 육지로 돌려서 육로를 따라 적의 내륙 쪽 후방을 찌를 수도 없었다.

 

싸워서 먹을 수도 없었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군대가 백성들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진도가 그나마 온전하여 가을에 8백 석을 보내왔다. 완도는 성 안에 농토가 좁았고 백성들은 일찍부터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 적이 닿지 않아서 완도는 온전했으나 군량은 콩 3백 석에 그쳤다. 완도에서 온 콩으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갔다. 수영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관아들은 3백 석, 4백 석씩을 보내왔거니 가을이 다 가도록 아예 기별이 없었다. 종사관을 보내 다그치면 고을 수령들은 빈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바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네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으 끝장이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네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 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

 

 


 

노을과 화약 연기

 
지금, 아무 일도 없는 바다 앞에서 임진년의 기억들은 멀고 흐리다. 바다는 기억을 지운다. 때때로 야경 수졸들의 호각 소리에 놀라 께어나는 새벽에 밑도 끝도 업이, 내가 죽인 아베 준이치의 눈동자와 아베가 죽인 면의 젖냄새와  적에게 끌어가 죽은 여진의 젓국 냄새, 그리고 또 내가 시켜서 목 베어 죽인 내 부하들의 잘린 머리의 뜬 눈이 떠올을 때, 지난간 전투의 기억은 계통 없이 되살아났다.

 

임진년 4월에, 경상 좌수영은 교전하지 않았다. 경상 해안은 비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3천이 빈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달려들었고, 그해에 30만이 바다를 넘어왔다. 조짐은 오래 전부터 감지되어왔다.  조정은 믿기 두려운 일을 믿지 않았다. 경상 연안포구들은 무인지경이었다. 적들은 편안히 포진했다. 봄농사를 시작한 연안 백성들은 마을을 버리고 먼 섬이나 골짜기로 달아났다.

 

 


 

비린 안개의 추억

 

봄에는 바다의 아침 안개가 일찍 삭았다. 물 위에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바람이 몰아가지 않아도, 멀리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띠처럼 흘러서 먼바다로 몰려갔다. 해가 수평선을 딛고 물 위로 올라서면,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새벽 순찰 길에 걷히는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나가면 봄바다의 비린내는 온몸에 감겼다. 나는 차고 비린 새벽 안개를 몸속 깊이 들이마셨다. 안개의 입자들이 허파 속으로 스몄다. 그 비린내는 새로운 시간의 비린내였다. 새로운 시간은 먼바다로부터 새뱍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듯했다.

 

새벽 순찰 길의 바다 안개는, 보이지 않는 바다 저편의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새로운 싸움을 예비하는 새로운 시간이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스몄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낯선 태초의 바다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은 싸움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맑은 시간이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그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바탕이었다. 새벽 바다에서 낯설고 맑은 시간들은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시간들을 다 건너가고 나서야 나의 전쟁은 끝날 것이었고 그때 비로소 나의 생사, 존망은 하나로 합쳐져 평안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시간의 파도는 끝도 없이 밀어닥쳤다.

 

지리산 둘레길 도보 여행

일상다반사 2013. 8. 12. 18:17 Posted by 따시쿵

지리산 둘레길을 아들과 같이 2박 3일 코스로 돌고 왔다. 

산이며 논이며 나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짙푸른 초록색으로 색칠해져 있는 자연을 만끽했다.


안양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남원역에서 하차.

우리와 같이 내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남원역 앞에서 주천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기에 여기저기 물어 봤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둘레길 지도에는 역앞 수퍼에서 바로 타면 된다는데 수퍼가 없다...ㅠㅠㅠㅠㅠㅠ


어째든 택시를 타고 주천 1코스 둘레길 출발점에 도착.

외국에서 시집 온 가이드가 빨간색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는 상냥하지 않은 말투로 알려 준다. 신경쓰지 않았다. 둘레길이 어려워 봐야 둘레길이지...일부러 다른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되겠다 싶었다.


논두렁과 시냇물과 작은 천을 사뿐히 뛰어 넘어서 아들과 재잘재잘 떠들면서 간다.

아들보다는 내가 더 들떠 있다. 뭥미???? 어째든 좋다.


자꾸만 산으로 인도하는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이건 둘레길이 아니라 등산이다. 아주 빡신 등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산 타는 것도 지리산 둘레에 있으니 둘레길은 맞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예상과는 180도 어긋난 둘레길 1코스.


자꾸만 올라가는데 끝이 안 보인다. 물통에는 물도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뛰엄뛰엄 지나가는 사람들도 만났지만 차마 물 좀 달란 말은 못하겠다. 아들은 목마르다고 얼굴색이 벌써부터 변해 있다.


지쳐 앉아 쉬는데 말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가서 어느 정도 가야하는지 물어 보려고 얼른 발걸음을 옮겨본다. 부부가 앉아서 쉬고 있다. 기진맥진한 부인이 먼저 어느 정도 남았는지 도리어 나한테 물어본다. 내가 물어봐야 하는데....쩝 어째든 힘들어 보인다. 남편되는 사람이 쉬엄쉬엄 가란다. 산을 넘어가야 한단다....이론...


지친 아들을 다독여서 출발해서 다리가 아프면 바로 쉬었다. 뽀다구 나는 아빠를 보여주는 건 이제 포기다.


쉬다보니 지나는 무리들이 2쌍이 쌩하니 지나간다. 뭘 먹고 저리 힘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내 처지를 생각해서 얼굴 인사만 한다. "안녕하세요?". 우리를 보고 부자끼리 왔다면서 신기하면서도 부러운 듯이 아빠와 아들이냐고 물어 본다. 아들은 그것이 왜 부러운지 모르는 눈치다. "아빠, 아빠랑 같이 오면 이상한거야??" 이상한게 아니고 부러워서 그런거야. 


다시 정상으로 출발....


돌산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정상에서 내리막 길로 가다보니 계곡물이 있다. 배낭을 벗고 머리에 물을 가져다가 쏟아 붓는다. 와우 시원하다. 물도 먹어 볼까나? 물병에 물을 떠서 벌컥벌컥.....아들도 벌컬벌컥.....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맛난 물맛을 실컷 맛봤다.


내리막길은 도란도란 수다를 떨면서 산속의 울창한 소나무 군락을 구경하면서 내려왔다.


어느덧 산을 내려와서 식당을 찾는데 없다. 물은 있는데 밥이 먹다. 나도 아들도 모두 배 고프다. 

시골길을 여름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차도 옆으로 걸어가면서 강아지풀이며 이름을 알수 없는 풀들을 따서 손에 들고 걸어간다. 재밌다.


드디어 목적지 민박에 도착.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점심 못 먹었다고 하니 과일을 주신다....게눈 감추 듯 다 먹었다.....아들도 과일을 가려서 먹는데 그런게 어딨으랴.....싹싹 긁어서 먹었다.....


저녁에 먹을 과자를 사러 가게를 찾았는데 없다. 산동네 오지에 있는게 맞다. 하루에 버스는 3번 온단다...정말 정말 오지 맞다.....


민박하는 집에 소를 키우는데 아들은 소를 처음봐서 그런지 신기해 한다. 쓰다듬어도 되? 덩치가 산만한데 아들이 무서운가 보다. 소는 엄청엄청 순하게 생겼다....나두 예전 시골에서 소를 키웠지만 지금은 소를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저녁 먹고 민박집 주인이랑 몇 마디 나누고 내일을 위해서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바로 꿈나라로 고고씽했다.


7시에 아침 밥을 먹고 인월로 출발...


차도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우리보고 뭐라뭐라 한다. 안 들린다...

가까이 가서 말씀을 들어보니 둘레길은 차도로 걸는게 아니란다...어쩐지 어제부터 차도로 걷는게 이상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ㅎㅎㅎㅎ


인월로 가는 중에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사진에 담아 본다. 


아래 사진 멋있지 아니한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지나온 길



                                    

가야할 길



인월에서 물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이틀째 민박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1박 2일에 나온 집이라서 그런지 다른 민박집들은 손님들이 없는데 여기는 4팀이나 민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짧은 2박 3일의 둘레길 여행이지만 아들과 단 둘이 떠난 것은 처음이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으며 한여름의 강한 햇빛으로 인해서 힘들었는데 묵묵히 따라 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이번 여행길은 아들과 같이 한 여행이였지만 어찌보면 나 자신이 힐링이 필요한 시점이였고 시골에서 맑은 공기와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기회였으며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시간이였다.


아내와 같이 동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에 서로에 대한 애틋함은 새록새록 생기는 계기도 되었다.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왔지만 여행의 여운은 아직도 온 몸에, 머릿속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탓이오. 아니, 내 탓만은 아니오....  (0) 2013.07.16
버릴 것도 없는 인생인데...  (0) 2013.07.02
부끄러운 '記者'의 이름  (1) 2013.05.14
아들의 격한 눈물.....  (2) 2013.02.23
12th wedding anniversary  (1) 2012.11.09

내탓이오. 아니, 내 탓만은 아니오....

일상다반사 2013. 7. 16. 00:1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언제나 그 '촉'이 문제였다.

왜 그놈의 촉이 발동했는지...뜬금없이 아들녀석의 독서록을 보고 싶은 촉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물보다 걸쭉한 피 때문이었을까. 아님 벼르고 별렀던 내 성질머리의폭발이었을까.

더 큰 문제는 그 촉이 한번에 끝나지 않았다는거다. 녀석 스스로 짜 놓은 기말고사 계획표대로 공부를 했다면 도저히 이런 개같은 점수는 나오지 못할 터, 시험공부에 쓰인 문제집을 가져오라 해서 훑었다.

말해 무엇하랴. 허어멀건한 곳이 온통이었으니.....문제풀이랍시고 해 놓은 데는 채점조차 하지 않았고....

내탓이오를 수백번 외쳐봐도 분기탱천한 마음 가눌 길 없다. 그래서 못난 어미 겨우 머리쓴답시고 한 짓이 자유 뺏고 나의 계획대로 이번 방학에 아이를 '조져버릴' 계획이다.

소 큰 놈 한마리 제대로 잃고 개박살난 외양간 이제사 고친다. 고쳐질지 확 부술지는 조금 더 두고봐야겠다.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둘레길 도보 여행  (1) 2013.08.12
버릴 것도 없는 인생인데...  (0) 2013.07.02
부끄러운 '記者'의 이름  (1) 2013.05.14
아들의 격한 눈물.....  (2) 2013.02.23
12th wedding anniversary  (1) 2012.11.09

버릴 것도 없는 인생인데...

일상다반사 2013. 7. 2. 09:01 Posted by 따시쿵



선택 할 수 있는 것도 선택한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버리지 말란다.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버릴 것이 있다는 데 감사한다.


오늘 아침은 장마 첫날이라 창밖으로는 비가 무지하게 내리고 있다.

천둥소리와 같이 내리는 비가 웬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루를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열심히 일해 보자.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둘레길 도보 여행  (1) 2013.08.12
내탓이오. 아니, 내 탓만은 아니오....  (0) 2013.07.16
부끄러운 '記者'의 이름  (1) 2013.05.14
아들의 격한 눈물.....  (2) 2013.02.23
12th wedding anniversary  (1) 201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