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 화
조 지 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천지에 꽃 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 넘쳐 난다. 껍질만 살짝 문질러도 생강 냄새가 확 풍기는, 산수유꽃 닮은 생강나무꽃, 사람 환장하게 한다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그리고 제비꽃, 메꽃, 달맞이꽃, 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다가 해가 나면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엘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 저 꽃들의 고요.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나니 /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한용운 [모순])라고 했거늘,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과 속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조지훈 시임은 섭리로부터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보여 준 시인이다.'지조志操'를 지킨 논객이었으며, '주정酒酊'의 교양과 '주격酒格'의 품계를 변별했던 풍류를 아는 학자였으며, 무엇보다 낙화를 찬미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이 시는 화두처럼 시작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꽃은 바람에 지지 않는다. 피면 지고, 차면 이울기 마련이라서, 꽃은 꽃의 시간이 다해서 지는 것이다. 저 꽃을 지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시간이다. 시인은 촛불이 켜진 방 안에서,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아니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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