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 자전거 여행2

오늘의 책 2013. 2. 16. 11:56 Posted by 따시쿵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조강에서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 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겨우 이해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들여다보면서 공자는 말했다.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저러하다'니, 어떠하다는 말인가. "저러하구나"라는 말은 '흘러가는구나'라는 말처럼, 나에게 들렸다. 그래서 공자의 말은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은 하나마나한 말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공자의 그 말을 읽을 때마다 언어를 버리거나 언어를 넘어서려는 성인의 조바심을 느꼈다. 흐르는 물가에서, 성인은 언어와 자연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당도한 것이다.

 

그 경계에서, 공자는 자연을 상대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기보다는 언어를 풀어서 놓아주고 곧바로 자연 쪽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는 끝끝내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공자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다시 인간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 부자유한 한계 안에서 공자는 아름답다. 시선을 거두어 안쪽으로 향한 공자가 "저러하구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연쪽으로 넘어가려는 자의 말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의 독백처럼 들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라고, 김소월이 그 단순성의  절창으로 노래할 때도, 그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에게는 들린다. 아마도 그것이 모든 서경시(敍景詩)의 운명일 것이다.

 


빛의 무한공간

김포평야

 

 

조선화가 겸재(謙齋, 1676 ~ 1759)는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강변 경관을 즐겨 그렸다. 겸재의 한강 화폭들은 강을 상류에서부터 그려내려오다가 행주산성 건너편인,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128미터) 위에서 끝난다. 개화산은 겸재의 최하류 관측소이다.

 

개화산 꼭대기는 강이 스러지는 하구에 폎쳐지는 공간의 무한감을 보여준다. 겸재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개화산 위에서 바라보는 한강 하구는 아득하게 넓어서 눈 둘 곳 없다. 겸재의 화폭 위쪽에서, 흐려진 조강은 멀리 김포반도 북단을 돌아서 서해로 나아가고 낮게 엎드린 산들은 산의 잔영으로 멀어진다.

 

조선의 화가들은 이 하구의 먼 산들을 잔산(殘山)이라고 불렀다. 잔산은 공간을 분할하지 않는다. 잔산은 공간 속으로 풀어져서 오히려 공간의 무한감을 완성시켜준다. 그 넓은 공간에 여린 빛들이 가득해서 겸재의 화폭이 보여주는 한강 하구와 김포 들판은 늘 새롭게 빛나는 무한강산이다.

 


10만 년 된 수평과 30년 된 수직 사이에서

고양 일산 신도시

 

내가 사는 마을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 신도시 지역이다. 경의선 철도의 왼쪽 평야지대로 그 서남쪽은 한강 하류에 닿아 강 건너로 김포평야를 마주 대한다. 1990년에 일산 신도시 개발사업이 시작될 때 이 지역은 찰지고 향기롭기로 유명한 일산미(一山米)가 생산되던 논이었다. 이 평야와 인접된 고양의 낮은 언덕에서는 10만 년전의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일산의 10만 년 역사는 1990년을 고비로 천지가 개벽하듯 바뀌어 논바닥은 신도시가 되었다.

 

일산 신도시는 수평의 삶을 수직의 삶으로 바꾸어놓은 마을이다. 자전거를 타고 자유로 언저리의 논길을 따라 교하, 출판문화단지, 오두산전망대를 거쳐 곡릉천 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10만 년 된 수평과 30년 된 수직 사이를 기웃거린다.

 

우리 마을에서는 해발 고도 83미터의 정발산이 가장 높은 산이다. 나머지 지역은 모두 해발 15미터 정도의 밋밋한 언덕들이 한강 쪽을 향해 흘러 내리고 그 사이에 작은 골짜기들이 이어져 있었다고 구일산 지역의 노인들은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은 모두 불도저에 밀려 나가서 언덕도 골짜기도 남아 있지 않다. 삶을 수직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그 땅을 수평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수직의 도시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 일산평야는 낮은 언덕과 골짜기들로 고저감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삶의 공간이 수직으로 바뀐 뒤 이 도시의 바닥은 이제 깎은 듯한 수평이다. 주거와 생활은 땅의 굴곡과 고저에 구체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직 구조물들을 받아내는 평면의 입지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10만 년 동안의 풍경이 30년 만에 바뀐 것이다.

 

정발산 꼭대기에서는 이 시가지의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강폭이 아득히 넓어진 하류의 한강이 느리게 흘러서 김포반도의 북단으로 돌아나가고 그 안쪽으로 수직의 건물군이 들어서 있다. 밤에는 러브호텔, 카바레, 안마시술소의 네온사인과 교회의 네온사인이 뒤섞여 불야성을 이룬다. 날이 저물면 사찰들의 용마루와 처마에도 네온사인이 켜진다.

 

30년 전의 논바닥을 갈아앞어서 세운 마을은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세속 도시다. 세속 도시의 교회들은 가정의 순결과 건강을 가장 중요한 현세적 덕목으로 가르친다. 일부일처제는 그 덕목의 풍속적 안전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