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효시로 우리 문단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국 현대시가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1월 1일부터 5월 4일까지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라는 타이틀 아래 정리되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00명의 시인들이 시를 추천했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입에 착착 붙는 다양한 시들이 소개되었다. 김소월, 한용운부터 김수영, 기형도를 거쳐 안현미, 김경주 같은 젊은 시인들의 시를 나란히 수록한 참신한 구성에, 정끝별·문태준 시인의 깊이와 재미를 아우르는 맛깔스러운 해설과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권신아·잠산의 감각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시의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전통적인 애송시와 함께 최근 발표된 시들이 맛깔스러운 여러 즐거움들과 함께 골고루 포함돼 있기 때문에 풍성함과 신선한 느낌을 함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를 살면서 마음 한구석 무언가 텅 빈 느낌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채워주는 정신의 ‘일용할 양식’과 같은 잠언집. 


작가 정채봉은 생전에 ‘어른을 위한 동화’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동심과 사랑, 자연, 나눔 등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어린이의 때 묻지 않은 맑은 시선을 통해 현대인의 은밀한 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기도 하고, 삶에서의 희로애락을 섬세한 시선으로 함축적으로 표현해내기도 했다.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동화적인 감성으로 철학적인 내용을 풀어냄으로써 모든 사물과 세상, 그리고 인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주는 명상잠언집이다. 그가 남긴 어떤 작품집보다도 그의 시적인 감성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집이기도 하다. 


우리들 각각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을 콕 꼬집어 냈는가 하면,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올바른 가치관을 우화적으로 표현해 지금의 내 모습과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또한 곤란과 갈등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되는 지혜와 단순하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정의와 진리도 담겨 있다. 


이 책은 마치 『탈무드』를 읽는 것처럼 쉽게 읽히면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깨달음을 주기에, 초등학생부터 2,30대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을 사는 지혜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작가 정채봉의 맑은 눈망울 속에서 깨끗하게 씻겨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4년 나온 동제의 책의 개정판에 해당한다.



정채봉(丁埰琫)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동화라는 창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환기시켜 주었던 아동문학가.


1946년 전남 승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위를 나는 새, 바다, 학교, 나무, 꽃 등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꽃다발」로 당선의 영예를 안고 등단했다.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화상(1986), 한국 불교아동문학상(1989),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2),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했다. 


깊은 울림이 있는 문체로 어른들의 심금을 울리는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만들어 냈으며 한국 동화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마해송, 이원수로 이어지는 아동 문학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모교인 동국대, 문학아카데미,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 등을 통해 숱한 후학을 길러 온 교육자이기도 했다. 동화 작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죽음의 길에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고,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평생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맑게 살았던 정채봉은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과 생명을 대하는 겸손함을 글로 남긴 채 2001년 1월,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편 우리에게 동화 작가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남긴 작품은 동화라는 제한적이고 규정적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놀라운 창작열로 소설과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유례를 찾기 힘든 문학적 향취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 문학사에서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동화의 독자를 어린이들로 한정하지 않고 성인들로 확장했다. 사실 동화 속에 담긴 메시지, 즉 순수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겨냥해야 하는 이들은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들이다. 많은 작가 외에도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님, 김수환 추기경님 등 여러 종교인들과 오랜 기간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


정채봉은 각박하고 흉흉한 세상살이를 겪는 동안 사람들은 애초에 지녔던 동심의 순수한 영혼을 잃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글로써 이들의 박토처럼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쓰게 된 것이 바로 ‘성인 동화’이다. 정채봉의 생각처럼, 어른들은 성인 동화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망실된 동심과 순수를 깨닫고 자신을 성찰하고 수굿한 위안을 받게 되었다. 2010년 건립된 순천문학관에는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정채봉관이 마련되어 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

윗독수리로부터 할큄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들은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의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아 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친 상흔이 나타났다.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독수리한테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뿐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내 자리에서 찾은 행복


올해 열두 살 난 소년 가장 수기를 읽었지요.

이 소년은 10년 전 뺑소니 교통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병시중을 혼자 들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사고가 난 후 곧바로 집을 나가 버렸고,

할아버지도 3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병원비 백만 원을 이 소년에게 짐 지워 놓았다는군요.


이 소년의 하루 일과는 이렇습니다.

새벽 4시, 사발 시계의 소리에 일어나서 신문 보급소행.

배달을 마치고 7시쯤에 돌아와서 밥을 지어 서둘러

아버지와 밥을 먹고 아버지 점심상을 봐둔 다음에 학교로.

이 소년의 점심은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준비해 준 도시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점심 도시락에 좀 다른 반찬이 있으면 몰래 덜어내

비밀봉지에 싸서 책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이 소년이 집에 돌아와서 하는 첫번째 일은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의

욕창 소독과 대소변 처리이며, 3일에 한 번씩은 관장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누워서 해 놓은 신발 밑창을 오리는 일거리를 

공장에 가져다 주고 새로 받아온 다음, 빨래하고, 청소하고, 저녁밥을 짓

는다고 합니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기시면서 남겨 놓은

새마을금고의 1백만 원 빚도 두 번만 넣으면 끝난다고 좋아합니다.


이 소년의 하루 가운데 가장 즐거운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남겨 온 반찬, 이웃집 아줌마가 담가 준 김치 그리고 콩나물국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이 순간의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증금 30만 원에 월 4만 원씩의 사글세 방에 사는 이 소년 가장의 수기는

놀랍게도 이런 글귀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용기가 있다. 만일 풍족한 생활

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면 지금의 이 작은 행복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

다. 이처럼 작은 행복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나에게 괴로

움과 힘을 함께 주었기 때문인다."

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효시로 우리 문단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국 현대시가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1월 1일부터 5월 4일까지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라는 타이틀 아래 정리되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00명의 시인들이 시를 추천했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입에 착착 붙는 다양한 시들이 소개되었다. 김소월, 한용운부터 김수영, 기형도를 거쳐 안현미, 김경주 같은 젊은 시인들의 시를 나란히 수록한 참신한 구성에, 정끝별·문태준 시인의 깊이와 재미를 아우르는 맛깔스러운 해설과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권신아·잠산의 감각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시의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전통적인 애송시와 함께 최근 발표된 시들이 맛깔스러운 여러 즐거움들과 함께 골고루 포함돼 있기 때문에 풍성함과 신선한 느낌을 함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현모 / 정조 사후 63년

오늘의 책 2012. 10. 3. 18:25 Posted by 따시쿵

박현모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정조의 성왕론(聖王論)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로 유교 정치의 핵심어인 성왕론을 통해서 조선조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해 1999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 내지 ‘국왕의 리더십과정’에 관한 좋은 텍스트로 보면 전혀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고 말하는 저자는 ‘텍스트로서 역사읽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아직도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세종실록》을 강의하는 꿈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및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으로 세종실록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을 강의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의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06 광주비엔날레 전시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정치가 정조(正祖)』 (2001), 『현대정치학』,『마인드맵으로 본 국제정치학』등이 있고, 역서로는『몸의 정치』(2000, 정화열 지음)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공저) 『정조 사후 63년』등이 있으며, 「세종의 공론정치」 「경국대전의 정치학」 「정약용의 군주론」 「Max Weber의 정치가론 연구」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치성」, 「정조의 정치현실 인식과 권도론」등 5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제1부  세도정치기 이전의 조선정치

 

조선왕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일본, 영국 등의 다른 왕조들의 평균수명(200 ~ 300년)의 두배 정도의 수명을 유지했다. 조선왕조가 장기 지속된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살펴보면 그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상유(相維)와 상제(相制)" 내지 "정당의 쟁의(爭議)"로 표현되는 '제도 안의 상호간 견제장치' ② 국왕이 정치를 잘못 했을 때 왕조를 바꾸지 않고 왕실의 다른 후보로 대체한다는 '반정(反正)의 정권교체 방식' ③ 중국 왕조와의 사대관계에 따른 대내외적 안전보장과 한반도의 지리학적 위치 ④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공론정치라는 정치 운영방식이다.

 

경국 또는 비슷한 의미의 경세(經世)라는 말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이나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의 저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국가경영 내지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가리킨다. 실제로 경국의 사유와 제도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에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퇴율성리학 이후 유학자들의 관심이 '정치체제의 구성'에서 '우주원리와 인간의 마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좋은 정치란 효율적인 제도가 아니라 위정자들의 도덕적 전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경국대전]이 만들어질 때까지 조선의 유학자와 위정자들은 좋은 제도를 구상하고 그들의 경국적 사유를 저술하는데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았다.

 

 

제2부 세도(勢道)정치기의 정치와 외교

 

순조시대(1800 ~ 1834)의 정국 운영방식과 언론의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세도정치'의 특징과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선 세도의 의미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세도정치의 일차적 의미는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세도가에 의해 자행되는 국권농단(弄權)'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것이다. 국왕이 주공(周公) 같은 군자(君子)에게 세도(世道)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총신 또는 척신에게 권세를 맡겨 오히려 세상의 도의를 망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세도정치는 조선왕조의 경우, 명종 때의 윤원형 일가나 정조 때 홍국영의 과두독재에서 있듯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세도정치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해는 국왕의 특별한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을 받은 외척에 의한 국정운영이라는 의미이다. 경주김씨,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국왕과 외척관계를 맺은 특정 가문의 의한 정국의 배타적 운영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세도정치는 정조로부터 연유한다. 즉 정조 말년에 "국왕의 깊은 지우를 입어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 ㅈ좌하는 책임을 부탁받은" 김조순의 존재가 그것이다. 실제로 [순조실록]은 정조가 김조순에게 세도를 위탁했으며, 김조순도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업무를 돕고 백관(百官)을 총찰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년"이였다고 자평(自評)하고 있다.

 

 

제3부 세도정치기 이후의 조선정치

 

조선왕조는 언제 왜 패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압적인 패망했다"일 것이다. 그런데 첫째 사항인 '언제' 즉 패망의 시기와 관련해서 1897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해 10월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은 '왕'에서 '황제'로 격상되었고, 국가의 명칭이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 정체와 국체 역시 [대한군국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면서 "505년간 지속된 조선왕조는 종언을 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1905년 11월의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을 중시하는 시각도 있다. 서재필은 "1905년까지 한국은 독립된 왕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종 역시 조약의 인준을 강용하는 이또 히로부미에게 "이 조약을 인준한다면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짐은 사직을 위해 죽을지언정 결코 허가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고, 결국 이또 히로부미는 그 다음 날 고종이 불참한 가운데 대신들의 날인을 받아 조약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가 망했다고 보는 근거로는 일본에 의해 ① 모든 외교권이 박탈당했고(1~2조) ② 통감(統監)에게 국내 통치권마저 빼앗겼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

오늘의 책 2012. 10. 3. 08:45 Posted by 따시쿵

오주석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 평가받은 그는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으며, 한국 전통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이다. 2005년 2월 49세의 나이에 혈액암과 백혈병을 얻어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쳤다.

 

그는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고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도록 가르쳐준다. 그림 속에서 무심히 지나칠 선 하나, 점 하나의 의미를 일깨우며 그림의 진정한 참맛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98년에 <단원 김홍도>로 시작된 그의 저술은 계속 이어지면서 옛 그림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학계에서는 그에 대해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 고증으로 회화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고 평가한다. 1995년 김홍도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 특별전'을 기획해 주목받았으며, 저서로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단원 김홍도』『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및 유작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 있다.

 

오주석은 “우리 옛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며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연을 해왔다. 그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는 옛말을 인용하며, "감상은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인 만큼 마음 비우기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대표작 『단원 김홍도』에서는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세 층위에서 당대의 화가 가운데서도 여러 방면의 그림을 가장 잘 그리고, 게다가 글씨까지 잘 쓴 서화가의 면모, 시를 잘 짓고 악기를 잘 다룬 풍류인의 면모, 그리고 사람 됨됨이가 호쾌하면서 일방 섬세한 선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 문일평 선생은 그를 일러 '그림 신선'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예술의 드높고 아득한 깊이를 말한 것이지만, 나아가서 그의 생김생김이나 인품, 그리고 초탈한 생활의 모습이 신선 같았다는 조희룡의 전기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김홍도의 작품 속에서 시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읽어내고 또한 그 자신과 스승 강세황의 여유롭고 해학적인 기질과 그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뛰어난 철인군주 정조의 훌륭한 예술적 안목과 위민정치의 양상을 읽어낸다.

 

 

 

1. 호방한 선線 속의 선禪 - 김명국의 <달마상>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은 화원 화가이며 성품이 호탕해서 얽매인 데가 없었고 거리끼는 것 또한 없없다. 그가 엄청난 술꾼이였다는 것은 '취한 늙은이'란 뜻의 별호(別號) 취옹(醉翁)으로 짐작된다.

 

달마는 누구이고 김명국은 누구인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렸는가, 달마가 김명국을 시켜 자신을 그리게 하였는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린 것은 관지(款識)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자장(磁場)은 선사(禪師) 달마가 김명국에게 자신을 그리게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의 진실이다. 그림의 필선(筆線)들은 화면 위에 각각 서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가? 선과 선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필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이 그것이다. 그것은 옷주름 선뿐만 아니라 얼굴선, 그리고 관서 글씨의 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기의 주인공은 김명국인가, 달마인가?

 

 

 

2. 잔잔하게 번지는 삼매경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강희안의 호, 인재(仁齋)부터가 '어진 이의 서재'로 읽히거니와, 그와 절힌했던 서거정(徐居正)은 한마디로 그를 가리켜 "사람됨이 재주 많고 덕이 있어 참으로 대인군자였다(爲人有才有德 眞大人君子也)"고 평한 적이 있다. 그의 어질고 고요한 성품은 강희안이 남긴 유일한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바로 꽃나무 키우는 요령과 감상법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도 엿볼수 있다. 

 

강희안은 풍류와 문장으로 이름난 명문가 출신이었다. 부친이 세종대왕과 동서간이었으므로 자신은 대왕의 처조카였으며, 부친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나라의 활자 글씨본을 두 차례나 썼고 문장도 뛰어나서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였다. 스스로 부지런히 도모하지 않고 나약하고 둔중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질 덕에 벼슬은 저절로 높아져 집현전 직제학까지 올랐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한 물 위에도 결이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속을 스쳐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 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잡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서는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물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생성을 이루는 바탕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은 관자(管子)의 수지(水地)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여, 아름다움과 추함, 어짊과 못남, 우둔함과 현명함을 낳는 장본이다.(水者何也 萬物之本原也 諸生之宗室也 美惡賢不肖愚俊之産也)"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다스려 교화시킬 때 그 해답은 물에 있다. 물이 한결같으면 사람들 마음이 바르게 되고, 물이 맑으면 민심이 편안해진다. 한결같으니 더러운 욕심을 내지 않고, 민심이 편안하니 행실에 삿됨이 없다.(是以聖人之化世也 其解在水 故水一則人心正 水淸則民心易 一則欲不汚 民心易則行無邪)" (관자)는 이어서 물이 가지는 주된 미덕과 갖가지 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물은 얼핏 겉으로 보면 여러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손으로 떠보면 한결같이 투명하다. 그 투명한 무색은 온갖 빚깔의 바탕이다. 그 깨끗함은 세상의 모든 더러움까지 씻어내린다. 그래서 옛 여인네들은 장독가에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일원성신께 각자 품은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물은 큰 절과 대성당에서 그대로 성수가 되고 지극히 고귀한 종교적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수가 되는 이치는 여염집 아낙네의 정한수와 똑같다. 물은 또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흐르지만 일단 수평을 이루면 멈춘다. 지극한 외로움이다. 그리고 물의 맛은 담담하니, 그것은 온갖 맛의 중용을 얻은 것이며 그 담담함은 바로 군자의 마음이다. 

 

 

3. 꿈길을 따라서 - 안견의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대왕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서른 살 되던 해(1447년) 어느 여름날 밤에 ,'꿈에서 노딜었던 도원을 그린 그림'이다. '도원桃源'이란 옛적 중국에서 길을 읽은 한 어부가 이상한 복숭아나무 숲에 이르러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맞닥뜨렸던, 꿈결 같은 이상향을 말한다. 유명한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보이는 '별유천지 비인간'이란 구절은 바로 그곳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 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무릉도원은 원래 중국의 자연시인 도잠陶潛글(365~427) [도화원기]에서 비롯한 말이다. <몽유도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므로 먼저 전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무릉 땅 사람 하나가 고기잡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강물을 따라 고기를 잡다가 길을 잃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가 없는 중에 홀연히 복숭아 꽃나무 숲을 만났다. 냇물 양편 기슭은 수백보나 되는데 다른 잡목은 없고 향기로운 풀만이 깨끗하고 아리따웠으며 날리는 꽃이파리가 어지러웠다.

 

어부는 매우 이상히 여겨 좀더 앞으로 가면서 그 숲이 끝나는 곳까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숲이 다하자 물의 연원淵源을 이루는 산 하나가 나타났다. 그 산에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그 뒤에서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리고 굴을 따라 들어갔다. 처음엔 매우 좁아서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날 만하더니 다시 수십 보를 더 가니 훤히 뚫리며 밣아졌다.

 

땅은 편편하고 넗은데 집들이 뚜렷하며 좋은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과 뽕나무와 대나무 들이 보였다. 또 길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과 개가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왔다 갔다 하며 씨 뿌리고 농사짓는 남녀의 옷 모양새는 모두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편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사실대로 갖추어 대답했더니 그 당장에 청하여 집으로 데려가서는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마련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와 캐물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 조상들이 진秦나라 시절 병란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가지 않았지요. 그래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영영 멀어진 겁니다." 하면서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 하고 묻는 것이다.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그 뒤의 왕조인 위진魏晋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들은 바를 일일이 자세히 얘기하자 사람들은 탄식하며 슬퍼했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이렇게 며칠을 머물다가 인사하고 떠났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오"하고 말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서 배를 찾게 되자, 어부는 곧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군에 이르러 태수를 뵙고 이 같은 사실을 말하였다. 태수는 곧 사람들을 보내 그를 따라가서 앞서 해두었던 표시를 찾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남양南陽에 사는 유자기劉子驥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마침내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나루를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도연명은 무릉도원이란 이를테면 일찍이 노자가 주장했던 "적은 국민이 모여 사는 작고 행복한 나라(小國寡民)"라는 영원한 이상향의 일례로서 동양 특유의 자연주의 사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무릉도원을 꿈에 보았다는 안평대군은, 자字가 청지淸之, 호號는 비해당匪懈堂 또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세종대왕은 '안평安平'이란 이름이 '편하고 무사하다'는 뜻으로 너무나 안이한 점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비해당'이라는 호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이것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증민편烝民篇에 보이는 "숙야비해夙夜匪懈 이사일인以事一人'에서 따온 말이니, "새벽부터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고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었다. 안평대군은 이렇듯 부왕父王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詩, 문文, 서書, 화畵, 악樂에 모두 능통하였다. 특히 당대에 제일가는 서예가였으므로 나라 활자인 경오자庚午字의 원본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풍류 왕자 안평대군이 우아하고 유려하기 그지없는 필치로 써 내려간 꿈의 내용은 <몽유도원도>에 이어지는 [몽원도원기夢遊桃源記]에 보인다.

 

 

정묘년 4월 20일 밤에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누우니, 정신이 갑자기 아뜩해지며 잠이 깊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문득 보니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핀 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오솔길이 숲 가장자리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을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이 하나 나왔다. 그는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하는 것이었다. 인수와 내가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 보니 절벽은 깍아지른 듯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다. 또 시내가 굽이지고 길은 꼬불꼬불하여 마치 백 번이나 꺽여나간 듯, 곧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골짝에 들어서자 골 안은 넓게 탁 트여 족히 2,3리는 될 듯했다.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 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했다. '바위에 나무 얽고 골짝에 구멍 뚫어 집을 지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 말한 게 아니겠나? 참말 도원 골짝일세! 그때에 옆에 누군가 몇사람이 뒤쪽에 서 있는 듯하여 돌아다보니, 정보貞父 최항崔恒과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등 평소 함께 시를 짓던 사람들이었다.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살펴보며 즐거워 하던 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시는 참으로 번화하니 이름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노니는 곳이요. 골짝이 다하고 절벽이 깍아지른 곳은 바로 그윽하게 숨어사는 은자隱者들의 거처다. 그러므로 몸에 화려한 관복官服을 걸친 자들의 자취는 깊은 산림에까지 미치지 아니하며, 돌과 샘물같은 자연에 정을 둔 사람들은 꿈에도 궁궐의 고대광실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성품이 고요한 이와 번잡함을 좋아하는 이가 서로 길이 다른 까닭에 자연스런 이치로서 그리 된 것이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하는 일이 많은데 어째서 그 꿈이 산림에까지 이르렀던가? 또 갔더라도 어떻게 도원까지 다다른 것인가? 또 나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에서 놀며 이 몇몇 사람들과만 함께 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 성격이 고요하고 외진 곳을 좋아하며 평소에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 있으며, 그 몇 사람과 특히 두텁게 사귀었던 까닭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가도可度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본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4. 미완의 비장미 - 윤두서의 <자화상>

 

 

 

 

윤두서의 삶을 관통해온 정신은 그의 호號 공재恭齋의 뜻 속에 담겨 있다.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의 말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군자가 공恭을 도탑게 하면 천하가 편온하게 된다(君子篤恭而天下平)"고. "그러므로 이른바 공이란 것은 바로 군자가 시작과 마침을 이루고, 위와 아래에 두루 통하는 도인 것이다(然則所謂恭子 乃君子成始成終 徹上徹下之道也)." 즉 공恭이란 바로 '군자의 길'이고 공재恭齋는 '군자의 길을 닦는 공부방'이라는 뜻이다.

 

윤두서는 국문학사상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로서 해남海南 고산고택孤山古宅을 이어가던 윤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일설에 의하면 다산의 실학實學은 그 연원이 외할아버지 윤두서를 거쳐서 그 증조부인 윤선도의 박학다문博學多聞 경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한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그의 학문이 얼마나 폭 넓은 것이었던가는 유명한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윤두서를 그리워하며 "이제 공께서 돌아가시니 친구를 사귀는 일이 외롭게 되었고, 그를 좇아 미처 듣지 못했던 새 지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公沒而友道孤也 無終而聞所未聞矣)"고 한탄한 글에서 실감할 수 있다. 이하 윤덕희가 쓴 윤두서 [행장]에서 그의 삶과 인간됨을 간추려 본다.

 

공재 윤두서 공公은 15세에 결혼하였는데 키가 훤칠하고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다......노복을 부릴 적에 위엄으로 하지 않거 덕스런 얼굴로 대하니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정축년(1697년, 서른 살)에 친아버지를 뵙기 위해서 남쪽 고향(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양어머니께서 시골 장원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고 명하셨다. 공께서 남으로 내려와서 부채 기록을 보니 그 액수가 퍽 많아서 그저 수천 냥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 빚을 진 사람들은 궁핍한 이가 많아서 도저히 갗을 길이 없었다. 공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버렸다......

 

학문에 있어서는 경전은 물론이고 군사 관계까지 미쳐서 세상에 전하는 병법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셨으며......일찍이 [정의]라는 글 한 편을 지어 장수의 도리를 갖추어 농하기도 하셨다......그림 그리는 일은 공께서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셨지만 때때로 글 짓고 쓰는 틈틈이 뜻 닿는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셨다. 다만 사물의 닮은 점만 위주로 하지 않았으므로 정신과 뜻의 나나탐이 완연히 살아 움직이며 드넓고 고상한 운치가 있었다. 오래 공부한 저력이 아니고는 이르지 못할 점이었다......혹 남이 다 아는 선대로부터 혐의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정말 그 사람 자신이 사귈 만하면 툭 터 놓고 한계를 넘어 매우 친하고 격의 없게 지냈다......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받은 재산이 자못 풍족하여 사람들은 벼슬만 없지 제후가 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일찍이 조금도 손대어 불리려 하지 않은 데다가 자식과 조카들이 점점 많아져서 쓰임새가 넓어지게 되었다. 또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남의 급하고 곤궁한 사정을 두루 돌보았는데 마치 필요한 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 하였다.

 

 


스야후이 / 소동파 선을 말하다

오늘의 책 2012. 9. 4. 18:02 Posted by 따시쿵

저자 : 스야후이


중국 사회과학원 대학원, 종교연구소에서 불교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당송팔대가라 불리는 대문호이자 경학, 서예, 그림, 요리 등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경지에 이른 소동파에게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그의 문학과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불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문학에 대한 깊은 소양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소동파가 추구했던 선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 보리 달마가 인도로부터 들여온 불교의 한 종파이다. 인간의 내면 중시, 지혜의 추구, 욕심을 버린 담박함 같은 특성을 가진 선은 중국 문인들과 끝없는 인연을 맺으며 그들의 정신을 자유로이 날게 했다. 독자들은 소동파가 주선하는 선과의 즐거운 만남을 통해 우리들의 정신 또한 자유로워짐을 느낄 것이다.



소동파 [ 蘇東坡 ] 1037.1.8 ~ 1101.8.24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眉山市] 출생(景祐 3년 12월 19일).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북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建中靖國 원년 7월 28일)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1.

蘇軾 (소식) - 水調歌頭 (수조가두)

                         


明月幾時有 (명월기시유)

把酒問靑天 (파주문청천)

不知天上宮闕 (부지천상궁궐)

今夕是何年 (금석시하년)

我欲乘風歸去 (아욕승풍귀거)

又恐瓊樓玉宇 (우공경루옥우)

高處不勝寒  (고처불승한)

起舞弄淸影  (기무롱청영)

何似在人間  (하사재인간)

轉朱閣低綺戶 (전주각저기호)

照無眠 (조무면)

不應有恨 (불응유한)

何事長向別時圓 (하사장향별시원)

人有悲歡離合 (인유비환이합)

月有陰晴圓缺 (월유음청원결)

此事古難全 (차사고난전)

但願人長久 (단원인장구)

千里共嬋娟 (천리공선연)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던가

술잔 잡고 푸른 하늘에 물어본다

천상의 궁궐도 알지 못하리 

오늘 밤은 어느 해인가

나는 바람타고 천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경옥 루각 옥집도 두렵기만하고

그 높은 곳의 추위도 이기지 못할까 

일어나 춤추며 내 그림자 희롱하며 노니

인간 세상에 또 이런 곳이 있을까

달은 붉은 누각 돌아

비단 창문에 머물러

밝은 빛 비추니 잠 이루지 못하네

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별할 때에는 늘 둥근가 

사람에게는 헤어짐과 만남이 슬프고 기쁘고

달은 둥글고 이지러짐에 따라 밝고 어둡지만

자고로 온전하기 만을 바랄수는 없는 일 

단지 바라는 바는 그 사람 오래토록

천리에 떨어져도 이 아름다움 함께하기를



2.

蘇軾 (소식) - 赤壁賦 (적벽부) 일부


客亦知夫水與月乎 (객역지부수여월호)

逝者如斯 (서자여사)

而未嘗往也 (이미상왕야)

盈虛者-如彼 (영허자여피)

而卒莫消長也 (이졸막소장야)

蓋將自其變者而觀之 (개장자기변자이관지)

則天地 (칙천지)

曾不能以一瞬 (증불 능이일순)

自其不變者而觀之 (자기불변자이관지)

則物與我-皆無盡也 (즉물여아개무진야)


而又何羨乎 (이우하선호) 

且夫天地之間 (차부천지지간)

物各有主 (물각유주)


苟非吾之所有 (구비오지소유)

雖一毫而莫取 (수일호이막취) 

惟江上之淸風 (유강상지청풍)

與山間之明月 (여산간지명월)

耳得之而爲聲 (이득지이위성)

目遇之而成色 (목우지이성색)

取之無禁 (취지무금)

用之不竭 (용지불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시조물자지무진장야)

而吾與子之所共適 (이오여자지공락)


손님께서도 역시 저 물과 달을 아십니까? (흐르는 물은)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영원히 흘러가고 마는 것은 아닙니다. (간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차고 빈 것은 저(달)와 같다지만, 영원히 커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릇(대개), 변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본다면 곧, 한순간도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 만물과 내가 영원한 것이니, 또한 무엇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무릇 이 천지 세상에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는 법이니, 만약에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털끝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직 산위의 밝은 달만이 있어,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그림이 되나니, 취해도 금할 자 없으며, 쓴다 해도 감히 없을 것입니다. 이는 조물주의 한없는 보물이므로 나의 그대가 함께 즐길 것들입니다.



신영복 /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오늘의 책 2012. 9. 4. 07:48 Posted by 따시쿵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신영복 선생의 동양고전 강의.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를 '관계론'의 관점으로 새롭게 읽는다.


이 책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며,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며 결국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人)은 인(仁)으로 나아가고, 인(仁)은 덕(德)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治國)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간다. 그리고 천하는 도(道)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로써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이고 한 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Shin, Young-Bok,申榮福

우리 시대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194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육사에서 교관으로 있던 엘리트 지식인이었던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 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가 1988년 8 ·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정보의 야적(野積)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합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가치와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知)는 지인(知人)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無知)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입니다. 



2.

鄭知常(정지상) - 送人(송인)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긴  강둑에는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서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 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3.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無逸(무일)


周公曰嗚呼 (주공왈오호)

君子所其無逸 (군자소기무일)

先知稼穡之艱難 (선지가색지간난)

乃逸 (내일)

則知小人之依 (칙지소인지의)

相小人 (상소인)

厥父母勤勞稼穡 (궐부모근노가색)

厥子乃不知稼穡之艱難 (궐자내부지가색지간난)

乃逸 (내일)

乃諺 (내언)

旣誕 (기탄)

否則侮厥父母 (부칙모궐부모)

曰昔之人無聞知 (왈석지인무문지)


군자는 무일(無逸,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4.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이 글은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 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세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司法) 원칙이였습니다.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이지요.



5.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한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국가 경영에 있어서 신(信)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천명한 까닭은 물론 그 기능적 측면을 고려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으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유입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백성이 곧 식(食)이고 병(兵)이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신뢰는 부국강병의 결정적 요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어] 의 이 대화의 핵심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秦나라 재상으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엄격한 법가적 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앙에게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상앙은 진나라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대궐 남문 앞에 나무를 세우고 방문(榜文)을 붙였지요. "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백금(百金)을 하사한다." 옮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금을 천금(千金)으로 인상하였지요. 그래도 옮기는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상금을 만금(萬金)으로 인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금을 기대하지도 않고 밑질 것도 없으니까 장난삼아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방문에 적힌 대로 만금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진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6.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樊遲問仁 子曰 愛仁 問知 子曰 知人


[논어]에 인仁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顔淵에게는 인이란 자기(私心)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仲弓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답변하는가 하면, 사마우司馬牛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其言也訒)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仁을 애인愛人 즉 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지樊遲는 공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모는 마부입니다. 늘 공자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자입니다. 번지에게 인의 의미를 애인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점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공公과 사私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은 나己와 남人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마우에게 이야기한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입니다"(其言也訒)라고 하는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하는 까닭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訒乎)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8.

이론과 실천의 통일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경험과 실천이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해서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최치원 선집 / 새벽에 홀로 깨어

오늘의 책 2012. 8. 21. 11:58 Posted by 따시쿵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신라 말의 문장가 · 학자. 경주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得難)’ 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駢)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 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 · 장(狀) · 서계(書啓) · 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内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 장 · 격(檄) · 서(書) · 위곡(委曲) · 거첩(擧牒) · 제문(祭文) · 소계장(疏啓狀) · 잡서(雜書) · 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고운(顧雲) ·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새벽 풍경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곧은 길 가려거든


어려운 때 정좌(正坐)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난 걸 어찌 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얻다 말하고


세상 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혼자 사는 중에게


솔바람 소리 빼곤 귀가 시끄럽지 않은 


흰 구름 깊은 곳에 띠풀로 지붕을 지었네


세상 사람 여길 알면 한스러우리


돌 위의 이끼가 발자국에 더럽혀질 테니.




가슴속 생각을 적다


세상만사 어지럽게 얽혀 있고


근심과 즐거움 또한 다단(多端)하려라.


부자도 만족하지 않는 듯하니


가난한 자가 어찌 안분자족(安分自足)을 하리.


통달한 이라야 영예를 버리고


초현히 홀로 올바로 보지.


누가 말했나, 허리 굽히는 일 부끄러워


산수간(山水間)에 일찍 들어가겠노라고.


힘써 농사지으면 또한 거두는 게 있어


기한(飢寒)은 거의 면할 수 있지.


평지에서도 풍파가 일고


평탄한 길에서도 험난한 일 생기네.


세상과의 사귐 사절했으니


세상 일이 어찌 나를 괴롭히겠나.


농부가 때때로 찾아오나니


농사일 이야기하다 웃기도 하네.


가고 나면 산에 지는 해를 요량해


고용히 사립문을 닫네.


지음(知音)이야 세상에 하나 없지만


아서라, 한탄해 무엇 하겠나.




피리 소리를 듣고


인생사란 흥했다 쇠하게 마련이니


부질없는 삶 참으로 슬프구나.


뉘 알았으리, 저 천상의 곡조


이 바닷가에서 연주하게 될 줄을.


물가의 전각(殿閣)에서 꽃구경하실 때 연주했었고


바람 부는 난간에서 달 보실 때 연주했었지.


이제는 선왕을 뵐 수 없으니


그대 좇아 눈물만 줄줄 흘리네.




멀리 타향살이 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도 표현했고, 당시 시대상으로 사회에 변혁을 이룰 수 없어서 막막해 하는 그래서 산천을 소요(逍遙)하는 한 선비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책 내용이다. 그리고 시, 산문, 창작글을 따로 단락을 두어서 읽는 사람들이 편하게 읽게 구성이 되었다.

시조나 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옛조상들에 대한 생활상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책은 자세한 설명을 붙여줌으로써 이해도를 높였다.

천재라는 단어를 항상 수식어처럼 달고 사람도 범부(凡夫)와 같이 고뇌하고 범민하는구나. 아니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 이책은 그런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신봉승 /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오늘의 책 2012. 6. 29. 09:02 Posted by 따시쿵

신봉승(辛奉承)


1980년대 만 8년 동안 MBC TV를 통해 방영된 대하사극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하여, ‘왕조의 세월’ ‘한명회’ 등 숱한 히트작을 발표하며 역사드라마의 현장을 지켜온 한국의 대표 극작가.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해온 그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작품으로 대중에게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왔다.

 

1933년 강릉 출생으로 강릉사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대문학」에 시·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한양대·동국대·경희대 강사,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대종상·청룡상 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강원국제관광EXPO 총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방송대상, 대종상, 청룡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 한국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고,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전 48권), 『소설 한명회』(전 7권), 『이동인의 나라』등의 역사소설과 역사에세이『양식과 오만』,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역사 그리고 도전』(전 3...1980년대 만 8년 동안 MBC TV를 통해 방영된 대하사극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하여, ‘왕조의 세월’ ‘한명회’ 등 숱한 히트작을 발표하며 역사드라마의 현장을 지켜온 한국의 대표 극작가.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해온 그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작품으로 대중에게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왔다.

 

1933년 강릉 출생으로 강릉사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대문학」에 시·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한양대·동국대·경희대 강사,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대종상·청룡상 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강원국제관광EXPO 총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도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러키 때문에 과거를 암으로써 현재를 재조명할 수 있고, 과거의 공과功過를 가려서 계승 발전 시킬 것과 단절시켜야 할 것들의 옥석을 가릴 수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책은 딱딱하지 않은 필체와 유려한 내용 구성으로 책을 읽는 순간 재미가 솔솔 나온다는 것이다. 역사책이라고 하면 흔히 알고 있는 시간적인 사건 구성과 등장 인물들의 딱딱한 캐릭터 선정으로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흔히 알고 있는 소설책 수준으로 글 전개를 하면서도, 사실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강한 임펙트를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한 부분이 맘에 든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라고 하면 파벌 싸움인 것만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다.

책 내용중에 다음의 두 구절은 전체적인 맥락에 맞는 글귀라 생각이 들어 포스팅한다.

 

 

 

군자君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하고 붕朋을 이루며

소인小人은 소인끼리 이利를 같이하여 붕朋을 이루니,

군주가 소인의 위붕僞朋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眞朋을 쓴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 구양수 <붕당론> 

 

 

 

영조대왕이 탕평비에 적었다는 공자의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실린 글귀다.

 

두루 통하여 편벽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편벽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천국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놀랍고 확신을 주는 책, 『3분』이 출간되었다. 하나님은 때 묻지 않은 네 살배기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천국의 신비로움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출간 직후 2011년 아마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3분』은 급성맹장수술을 받았던 소년 콜튼 부포가 천국에 머물렀던 3분 동안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해준다. 천국은 단순히 휘황찬란한 문들과 빛나는 강물과 번쩍이는 보석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세상에서 내게 진정 소중한 존재였던 이들을 다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의 은총 아래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생활의 장소이다. 이 책은 물론 콜튼이 경험했던 천국의 모습을 바탕으로 진행되지만,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비추어 검증되었기 때문에 허황되거나 신비주의적 내용은 없다. 따라서 어린 소년이 보고 온 천국은 그곳을 동경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가져다 줄 것이다.


Todd Burpo

네브래스카 주의 임페리얼에 소재한 크로스로드 웨슬리언 교회(Crossroads Wesleyan Church)의 목사다. 그는 체이스 카운티 공립학교(Chase County Public School)의 레슬링 코치이기도 하며, 그 학교 위원회의 멤버로서 봉사한다. 그는 네브래스카 주의 자원 소방관 모임의 지도목사로 활동하며, 또한 아내 소냐와 함께 차고 문(garage door) 회사도 운영하고 있다. 1991년에 오클라호마 웨슬리언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면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목사 안수는 1994년에 받았다. 어린이 사역자로 적극 활동하고 있는 아내 소냐와의 사이에 2남 1녀(캐시, 콜튼, 콜비)를 두었다. 이중 특히 네 살 때 천국 여행을 다녀온 콜튼은 현재 열두 살의 매우 활동적인 소년으로 성장했다. 토드 버포 가족은 지금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임페리얼에 살고 있다.




<3분> "Heaven is For Real" 책은 천국이 실제로 존재함을 알려주는 책이다. 책 제목 그대로 천국을 다녀온 어린아이가 몇년에 걸쳐서 말한 것을 정리하고, 아빠가 목사님이다보니 성경에 대한 이해와 인용을 함으로써 이해도를 높였다.


생사를 오가는 어린아이의 위급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과 수술을 하는 시간에 어린 아이는 천국을 다녀오고, 부모는 수술실 밖에서 수술 잘 되기만을 기도함으로 이루어진 자식에 대한 사랑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 잠깐 동안에 천국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일들...즉 하나님과 예수님을 본 것, 가브리엘 천사장을 본 것, 할아버지를 만난 것, 유산해서 잃은 누나를 만난 것 등등등...


목사이신 아빠는 "삶이 나를 괴럽히지 않으면 밖에서만 들렸을 그 음악이 지금은 내면 깊은 곳에서 계속 흐르고 있다." 라고 고백한다. 주인공 아빠는 아들을 살려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기도를 했고, 그 기도가 "~ 뭐뭐 해 주세요"란 공손한 기도도 했지만, 울분을 터트리는 기도도 했다. 


난 믿는다. 그 기도가 절박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는 것을.

하나님은 때때로 은혜를 베푸시고, 때때로 일용할 양식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믿고 감사하고 의지하면서 산다면 큰 파도가 와도 넘을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참고로 예수님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고, 사이트가 있어서 같이 올린다.

아키아나 크라마리크의 웹사이트 ( http://www.artakiane.com) 를 방문보자.


3분의 주인공 어린 아이가 검증해 준 그림이고, 아키아나 어린이도 천국을 다녀와서 그린 그림이다.




Prince Of Peace


Perhaps I wanted to catch it

perhaps not


But one morning

an eagle dropped a diamond


And right then

with my faulty brush

full of my own hair

I wanted to paint


I wanted to paint the wings-

Too late - they flew away

I wanted to paint a flower

Too late - it withered


That night the rain

was running after me

Each drop of rain

showed God's face

His face was everywhere

On homes and on me


I wrung out the love

to make the red


I wrung out the stumps

to make the brown


I wrung out the trust

to make the pink


I wrung out my own eyes

to make the blue


I wrung out the seaweed

to make the green


I wrung out the nightly pain

to make the black


I wrung out my grandmother's hair

to make the gray


I wrung out my visions

to make the violet


I wrung out the truth

to make the white


Today I want to paint God's face

IT'S NOT TOO 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