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 칼의 노래

오늘의 책 2013. 10. 4. 13:43 Posted by 따시쿵

김훈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기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 없는 수영을 밝고 지나갔다. 그래 가을에 해남, 강진,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경상 해안 쪽 추수는 적들이 몰아갔다. 적들은 여수, 순천 너머에 포진했고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들은 연안 육지의 성 안에 군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직 적의 군량을 빼앗기 위한 전투를 궁리해 보았으나 적의 육지 요새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없었고 수군을 육지로 돌려서 육로를 따라 적의 내륙 쪽 후방을 찌를 수도 없었다.

 

싸워서 먹을 수도 없었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군대가 백성들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진도가 그나마 온전하여 가을에 8백 석을 보내왔다. 완도는 성 안에 농토가 좁았고 백성들은 일찍부터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 적이 닿지 않아서 완도는 온전했으나 군량은 콩 3백 석에 그쳤다. 완도에서 온 콩으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갔다. 수영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관아들은 3백 석, 4백 석씩을 보내왔거니 가을이 다 가도록 아예 기별이 없었다. 종사관을 보내 다그치면 고을 수령들은 빈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바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네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으 끝장이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네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 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

 

 


 

노을과 화약 연기

 
지금, 아무 일도 없는 바다 앞에서 임진년의 기억들은 멀고 흐리다. 바다는 기억을 지운다. 때때로 야경 수졸들의 호각 소리에 놀라 께어나는 새벽에 밑도 끝도 업이, 내가 죽인 아베 준이치의 눈동자와 아베가 죽인 면의 젖냄새와  적에게 끌어가 죽은 여진의 젓국 냄새, 그리고 또 내가 시켜서 목 베어 죽인 내 부하들의 잘린 머리의 뜬 눈이 떠올을 때, 지난간 전투의 기억은 계통 없이 되살아났다.

 

임진년 4월에, 경상 좌수영은 교전하지 않았다. 경상 해안은 비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3천이 빈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달려들었고, 그해에 30만이 바다를 넘어왔다. 조짐은 오래 전부터 감지되어왔다.  조정은 믿기 두려운 일을 믿지 않았다. 경상 연안포구들은 무인지경이었다. 적들은 편안히 포진했다. 봄농사를 시작한 연안 백성들은 마을을 버리고 먼 섬이나 골짜기로 달아났다.

 

 


 

비린 안개의 추억

 

봄에는 바다의 아침 안개가 일찍 삭았다. 물 위에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바람이 몰아가지 않아도, 멀리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띠처럼 흘러서 먼바다로 몰려갔다. 해가 수평선을 딛고 물 위로 올라서면,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새벽 순찰 길에 걷히는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나가면 봄바다의 비린내는 온몸에 감겼다. 나는 차고 비린 새벽 안개를 몸속 깊이 들이마셨다. 안개의 입자들이 허파 속으로 스몄다. 그 비린내는 새로운 시간의 비린내였다. 새로운 시간은 먼바다로부터 새뱍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듯했다.

 

새벽 순찰 길의 바다 안개는, 보이지 않는 바다 저편의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새로운 싸움을 예비하는 새로운 시간이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스몄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낯선 태초의 바다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은 싸움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맑은 시간이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그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바탕이었다. 새벽 바다에서 낯설고 맑은 시간들은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시간들을 다 건너가고 나서야 나의 전쟁은 끝날 것이었고 그때 비로소 나의 생사, 존망은 하나로 합쳐져 평안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시간의 파도는 끝도 없이 밀어닥쳤다.

 

지리산 둘레길 도보 여행

일상다반사 2013. 8. 12. 18:17 Posted by 따시쿵

지리산 둘레길을 아들과 같이 2박 3일 코스로 돌고 왔다. 

산이며 논이며 나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짙푸른 초록색으로 색칠해져 있는 자연을 만끽했다.


안양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남원역에서 하차.

우리와 같이 내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남원역 앞에서 주천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기에 여기저기 물어 봤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둘레길 지도에는 역앞 수퍼에서 바로 타면 된다는데 수퍼가 없다...ㅠㅠㅠㅠㅠㅠ


어째든 택시를 타고 주천 1코스 둘레길 출발점에 도착.

외국에서 시집 온 가이드가 빨간색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는 상냥하지 않은 말투로 알려 준다. 신경쓰지 않았다. 둘레길이 어려워 봐야 둘레길이지...일부러 다른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되겠다 싶었다.


논두렁과 시냇물과 작은 천을 사뿐히 뛰어 넘어서 아들과 재잘재잘 떠들면서 간다.

아들보다는 내가 더 들떠 있다. 뭥미???? 어째든 좋다.


자꾸만 산으로 인도하는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이건 둘레길이 아니라 등산이다. 아주 빡신 등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산 타는 것도 지리산 둘레에 있으니 둘레길은 맞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예상과는 180도 어긋난 둘레길 1코스.


자꾸만 올라가는데 끝이 안 보인다. 물통에는 물도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뛰엄뛰엄 지나가는 사람들도 만났지만 차마 물 좀 달란 말은 못하겠다. 아들은 목마르다고 얼굴색이 벌써부터 변해 있다.


지쳐 앉아 쉬는데 말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가서 어느 정도 가야하는지 물어 보려고 얼른 발걸음을 옮겨본다. 부부가 앉아서 쉬고 있다. 기진맥진한 부인이 먼저 어느 정도 남았는지 도리어 나한테 물어본다. 내가 물어봐야 하는데....쩝 어째든 힘들어 보인다. 남편되는 사람이 쉬엄쉬엄 가란다. 산을 넘어가야 한단다....이론...


지친 아들을 다독여서 출발해서 다리가 아프면 바로 쉬었다. 뽀다구 나는 아빠를 보여주는 건 이제 포기다.


쉬다보니 지나는 무리들이 2쌍이 쌩하니 지나간다. 뭘 먹고 저리 힘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내 처지를 생각해서 얼굴 인사만 한다. "안녕하세요?". 우리를 보고 부자끼리 왔다면서 신기하면서도 부러운 듯이 아빠와 아들이냐고 물어 본다. 아들은 그것이 왜 부러운지 모르는 눈치다. "아빠, 아빠랑 같이 오면 이상한거야??" 이상한게 아니고 부러워서 그런거야. 


다시 정상으로 출발....


돌산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정상에서 내리막 길로 가다보니 계곡물이 있다. 배낭을 벗고 머리에 물을 가져다가 쏟아 붓는다. 와우 시원하다. 물도 먹어 볼까나? 물병에 물을 떠서 벌컥벌컥.....아들도 벌컬벌컥.....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맛난 물맛을 실컷 맛봤다.


내리막길은 도란도란 수다를 떨면서 산속의 울창한 소나무 군락을 구경하면서 내려왔다.


어느덧 산을 내려와서 식당을 찾는데 없다. 물은 있는데 밥이 먹다. 나도 아들도 모두 배 고프다. 

시골길을 여름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차도 옆으로 걸어가면서 강아지풀이며 이름을 알수 없는 풀들을 따서 손에 들고 걸어간다. 재밌다.


드디어 목적지 민박에 도착.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점심 못 먹었다고 하니 과일을 주신다....게눈 감추 듯 다 먹었다.....아들도 과일을 가려서 먹는데 그런게 어딨으랴.....싹싹 긁어서 먹었다.....


저녁에 먹을 과자를 사러 가게를 찾았는데 없다. 산동네 오지에 있는게 맞다. 하루에 버스는 3번 온단다...정말 정말 오지 맞다.....


민박하는 집에 소를 키우는데 아들은 소를 처음봐서 그런지 신기해 한다. 쓰다듬어도 되? 덩치가 산만한데 아들이 무서운가 보다. 소는 엄청엄청 순하게 생겼다....나두 예전 시골에서 소를 키웠지만 지금은 소를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저녁 먹고 민박집 주인이랑 몇 마디 나누고 내일을 위해서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바로 꿈나라로 고고씽했다.


7시에 아침 밥을 먹고 인월로 출발...


차도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우리보고 뭐라뭐라 한다. 안 들린다...

가까이 가서 말씀을 들어보니 둘레길은 차도로 걸는게 아니란다...어쩐지 어제부터 차도로 걷는게 이상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ㅎㅎㅎㅎ


인월로 가는 중에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사진에 담아 본다. 


아래 사진 멋있지 아니한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지나온 길



                                    

가야할 길



인월에서 물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이틀째 민박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1박 2일에 나온 집이라서 그런지 다른 민박집들은 손님들이 없는데 여기는 4팀이나 민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짧은 2박 3일의 둘레길 여행이지만 아들과 단 둘이 떠난 것은 처음이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으며 한여름의 강한 햇빛으로 인해서 힘들었는데 묵묵히 따라 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이번 여행길은 아들과 같이 한 여행이였지만 어찌보면 나 자신이 힐링이 필요한 시점이였고 시골에서 맑은 공기와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기회였으며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시간이였다.


아내와 같이 동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에 서로에 대한 애틋함은 새록새록 생기는 계기도 되었다.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왔지만 여행의 여운은 아직도 온 몸에, 머릿속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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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탓이오. 아니, 내 탓만은 아니오....

일상다반사 2013. 7. 16. 00:1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언제나 그 '촉'이 문제였다.

왜 그놈의 촉이 발동했는지...뜬금없이 아들녀석의 독서록을 보고 싶은 촉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물보다 걸쭉한 피 때문이었을까. 아님 벼르고 별렀던 내 성질머리의폭발이었을까.

더 큰 문제는 그 촉이 한번에 끝나지 않았다는거다. 녀석 스스로 짜 놓은 기말고사 계획표대로 공부를 했다면 도저히 이런 개같은 점수는 나오지 못할 터, 시험공부에 쓰인 문제집을 가져오라 해서 훑었다.

말해 무엇하랴. 허어멀건한 곳이 온통이었으니.....문제풀이랍시고 해 놓은 데는 채점조차 하지 않았고....

내탓이오를 수백번 외쳐봐도 분기탱천한 마음 가눌 길 없다. 그래서 못난 어미 겨우 머리쓴답시고 한 짓이 자유 뺏고 나의 계획대로 이번 방학에 아이를 '조져버릴' 계획이다.

소 큰 놈 한마리 제대로 잃고 개박살난 외양간 이제사 고친다. 고쳐질지 확 부술지는 조금 더 두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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