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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오늘의 책 2013. 10. 5. 12:08 Posted by 따시쿵

저 : EBS 역사채널ⓔ


EBS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기획한 프로그램으로 5분 분량의 강렬한 메시지와 세련된 영상을 통해 한국사의 주요 사건이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에 기획편성되어 일주일에 한 편씩 방영되며, 영상과 메시지를 통해 우리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학부모, 교사, 청소년 등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어떤 젊음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급하게 몰아가는데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 할 것인가."

 

 

어느 양반가의 망명길

 

1910년 12월 30일 밤, 한 무리가 어둠을 뚫고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젖먹이부터 60대까지 섞인 기다란 행렬은 국경을 지키는 일본 감시병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향했다. 한 해가 막 저무는 야밤, 이들이 북풍이 몰아치는 살벌한 국경선을 넘어야 했던 사정은 무엇일까?

 

이들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집안일을 돕던 식솔들로 그 수가 무려 60여 명에 이르렀다. 이유승의 여섯 아들은 서울 장안에서 우애 좋기로 유명했다. 첫째 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 넷째 회영, 다섯째 시영, 여섯째 호영, 이들이 12월 어느 날 함게 모인 자리에서 넷째 회영은 형제들에게 호소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나라가 망하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형제들은 우당 이회영의 말에 따라서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정한다. 여섯 형제의 뜨거운 결의는 향후 30여년간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됐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우당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경술국치가 잇던 1910년 당시,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다.

 

 

무장독립투쟁의 씨앗,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우당은 여섯 형제 가운데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호방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의 현실은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었다. 30대부터 항일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농장을 경영했던 우당은 40대 중반에 들어선 1905년 가을,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으로 한국의 외교원을 금지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항의했다. 젊은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함께 해 온 이상설, 동생 이시영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대한제국은 109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2년 뒤에는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더이상 활동을 펼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우당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찾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이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우당은 나라 밖 상황에 주목했다. 우선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해 국원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고종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특사로 추천했다.

 


 

100년 만의 귀환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

 

1592년 임진왜란

함경도 일대에서 벌어진 최대 육상전

북관대첩

 

단 한 번도 진 저기 없는

'전쟁의 신' 가토 기오마사 부대

2만 2천여 명

VS.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

200명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패퇴한 왜군

 

1905년 러일전쟁

북진하던 일본군은

함경북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

 

비석은 강제로 떼어져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무거운 머릿돌로 눌린 후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된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드라마 같은 이야기

 

400년 전 온 나라가 전쟁으로 파탄에 빠졌을 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용감한 이들이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잊었다. 100여 년 뒤인 1707년 그들의 이야기를 한 후손이 돌에 새겼다. 그 뒤 돌에 새긴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역사에 묻혔다. 세월이 지난 후 역사에 묻혀 있던 돌은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파란만장의 돌은 우여곡절 많았던 사나이들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바로 북관대첩비의 이야기다. 북관대첩비의 정식 이름은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북관대첩비는 말 그대로 북관(北關)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북관은 오늘날의 함경도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크게 무찌른 일을 기념해 숙종 35년(1709년)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이다. 높이 187센티미터, 너비 66센티미터, 두께 13센티미터의 비석에는 150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병장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비석을 세운 이는 정육품인 함경도 북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로 부임한 최창대였다.

 

북관대첩비의 운명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편으 드라마처럼 기구하다. 왜 비석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세워질 수 있었을까?

 

1592년 4월 중순,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논란 선조는 4월 30일 피난에 나섰고 한양은 5월 2일, 2개월 만인 6월 14일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되었다. 날이 더워질수록 일본 군사들의 사기는 올라가는 듯했다.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스물여덟 살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민의에 부응해 그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함경도의 의병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남쪽의 왜군과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북쪽의 여진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정문부를 비롯한 북관의 의병들은 1592년 9월부터 반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의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겨준 역적들을 소탕했고, 경성, 임명, 단천, 백탑교에서 여덟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해 함경도에서 몰아냈다. 하급 무관이 이끈 200여 명 의병부대가 명장 지휘하의 2만 명 정예부대를 크게 깨부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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