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박상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2.03 박상진 /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1

박상진 /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오늘의 책 2013. 2. 3. 18:48 Posted by 따시쿵

박상진(朴相珍)


 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2004),『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랜덤하우스중앙, 2004),『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를 비롯해 전문서인『목재조직과 식별』(향문사, 1987) 등 여러 저서를 펴냈다

 

 

 

 

역사의 격변을 묵묵히 지켜보다

헌법재판소 백송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안에는 11그루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사람 등살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공해 도시 서울에 수백 년에서 천 년 가까이 살아가는 늙은 나무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약해빠진 노(老) 생명체가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아직은 '희망의 땅'이라는 증거라서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 중 수도 서울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헌법재판소의 백송을 찾아가 보자.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에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계유정난'이란 이름의 쿠테타가 일어난다. 피바다가 돼버린 마을에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재를 가져다가 뿌렸다. 이루 '잿골'이 됐다가 지금의 재동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참극이 벌어졌던 재동의 한 편에는 핏빛에 어울리지 않은 깨끗한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한양에는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즈음, 누군가가 멀리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생장이 느린 백송도 조금씩 몸집을 키워가는 사이, 자람 터는 어느덧 영조 때 유명한 재상 조상경의 집이 돼 있었다. 그는 7번에 거쳐 판서를 지내면서 조선 후기 풍양조씨 세도정치릐 추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이후 백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는 조씨 일가와 함께 영광의 세월을 함께 했다.

 

 


 

새마을 운동도 피해간 신령스러운 숲

원주 성남리 성황림

 

중앙고속도로 신림IC를 나와 영월쪽으로 접어들었다가 곧 좌회전 후 잠시면 도로 옆 평지에 펼쳐진 숲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서낭신을 모신 대표적인 성황림(城隍林)이다. '대동여지도'에 신림(神林)이란 이름이 나올 만큼 오래된 숲이다. 멀리 치악산 국립공원의 남쪽 끝에 우뚝 솟아오른 남대봉에서 발원한 주포천이 숨가쁜 물길을 잠시 멈춘 편평한 땅,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삶의 터를 잡았다. 당연히 마을을 지켜주고 소원을 빌 공동의 성황당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서낭나무를 심고 주위에 숲을 만들어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낭나무 한 두 그루로 서낭당 가꾸기에 만족한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비교적 넓은 숲을 마련했다. 한 평의 농경지고 아쉽지만 이렇게 평지를 서낭숲으로 가꾼 데는 홍수 조절의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림'이란 이름 그대로 신이 사는 숲,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개화기의 혼란과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사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숲은 세월이 지나면서 위 서낭과 아래 서낭으로 나위어 졌고, 일찍이 학술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일제때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로 지정됐다. 1962년 우리 손으로 다시 천연기념물 92, 93호로 이름 바꿈을 했다.

 

 


 

조선 관리들의 희로애락

평창 옛 운교역 밤나무

 

밤나무골 º 밤나무고개 º 율동(栗洞) º 율목동(栗木洞) º 율전동(栗田洞) 등 밤나무가 들어간 지명은 의외로 흔하다. 밤나무는 열매와 목재 모두 쓰임이 많아, 1천여 종에 이르는 이 땅의 나무 중 우리와 가까이 지낸 나무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친숙하다. 6월에 회백색 꽃이 피었다가 가을밤 알밤을 거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거리의 군밤까지, 밤은 여러 번 변신을 한다.

 

밤나무는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천연기념물 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것은 최근 지정된 옛 운교역 밤나무뿐이다. 밤나무혹벌이라는 눈꼽 크기 남짓한 벌레의 피해를 받아 재래종 밤나무 고목이 거의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운교리 밤나무는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에서 방림, 평창으로 들어가는 42번 국도 옆 작은 음식점 뒤편 산비탈에 자라고 있다. 뿌리목 둘레가 6.4m나 되니 굵기는 지름 2m를 훌쩍 넘긴다. 1.5m 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있고, 갈라진 줄기도 지름이 1m가 넘는다. 나무 키는 14m이며 굵은 가지 여러 개가 얼기설기 뻗어 있다. 흔히 만나는 재배 밤나무와는 달리 엄청난 굵기가 놀라울 뿐이다. 고목으로서의 의젓한 품위와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돋보인다.

  


 

나라의 큰 일을 예언하다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영월읍내의 끝자락 언덕바지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주변에는 낮은 단층집이 몇 채 있고 멀리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을 이루는 합수(合水) 지점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 나무는 영월엄(嚴)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당나라 현종(712~756)때 파락사로 신라에 왔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고향 땅이 어수선해지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마치 배의 모양이므로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은행나무를 심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봉서 신범(辛汎, 1823~1879)이란 분이 있다. 규장각에 보관된 그의 시문집 '봉서유고(逢西遺稿)'에 실린 '월행(越行)'이란 기행문의 내용에는 그가 본관인 영월을 찾아 남긴 시 한 수가 있다. '발산은 평지에 멈추고/강 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구나/마을의 가운데는 천년된 은행나무가 자라고/예뿌터 엄씨들이 살고 있네.'

 

이를 통해 150여 년 전에도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었고 엄씨의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심은 은행나무를 엄씨들은 대대손손 보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14.8m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2003년 문화재청 일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이다.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이는 1,300년으로 양평 용문사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보다 2백년 앞선다.

 

 


 

쫒기던 임금도 쉬어가다

울진 실직국왕 굴참나무

 

고려 충숙왕 16년(1329) 정월, 임금은 황해도 평주의 천신산 아래 가옥(假屋)을 짓고 벌써 몇 달째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임금 노릇은 팽개치고 놀이에 열중한 것이다. 어느 날 지붕에서 물이 새자 사람들에게 "지붕을 덮는데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굴참나무 껍질이 가장 좋습니다."고 말했다. 곧장 백성들을 동원해 겨울나무 껍질을 벗기니 모두 고통스러워했다.

 

이처럼 옛부터 굴참나무의 가장 중요한 쓰임은 지붕을 이는데 있었다. 두께가 3~4cm 나 되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연이 준 방수물질이며 뛰어난 보온성을 가졌으니, 지붕 이는 데는 따라 갈 재료가 없다. 그래서 굴피집은 굴피나무가 아니라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든다.

 

굴참나무는 또 다른 쓰임이 있다. 다른 참나무처럼 흉년이 들면 풍년 때 보다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아,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울진의 굴참나무 한 그루를  찾아 본다.

 

동해안을 따라 길게 세로로 뻗은 7번 국도는 동해바다와 함께 달린다. 멀리 수평선에 걸쳐진 구름 한 조작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을 수 있다.

 

강릉과 포항의 가운데쯤이 울진읍이다. 읍을 벗어나 우회전하면 불영계곡 입구. 집 몇 채가 있는 삼거리의 마을 뒷산의 굵기가 네 아름에 이르는 굴참나무 한 그루가 동해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굴참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앞에 서서 훑어보면 정말 호호 할아버지 나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늙은 굴참나무다. 온통 충전물질로 채워둔 몸통과 울퉁불퉁 살아온 역사를 새겨놓은 껍질이 우선 그러하다. 약 3m 정도의 높이에서 굵은 가지 하나가 바다를 향해 거의 수평으로 길게 뻗은 모습도 힘에 겨워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것 같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보다 훨씬 늦지만 그래도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나무라고 다를 바 없다.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제는 기력이 쇠진해 있다. 그래도 앞에 서면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우리를 압도하는 위엄을 갖고 있다.

 

 


 

소나무 베어 팔아 마을을 지키다

예천 금당실 솔숲

 

살기 좋은 땅을 길지(吉地)라고 한다. 오늘날이야 자고 나면 값이 뛰는 땅이 길지이겠지만, 옛 사람들은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고 천재지변에도 안전한 곳을 최고의 길지로 생각했다. 경북 예천의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 마을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전국 열 곳에 이르는 살기 좋은 땅(十勝지之地) 중 한 곳이다. 선정기준을 따로 말하지 않았으니, 하고 많은 우리 금수강산에서 왜 이곳이 네번째의 좋은 땅으로 선택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기야 '십승지지'란 곳이 임진강 이북은 한 곳도 없고, 경상도가 다섯 곳이나 들어 있으니, [정감록] 저자가 자기가 아는 곳에서만 골라 넣은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복천, 용문사 계곡, 청룡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만나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살기 좋은 길지라고 했지만 물난리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단점을 가진 명당을 우리 선조들은 비보(裨補), 즉 모자람을 채워 넣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홍수가 마을로 들이 닥치는 것을 막아주고, 넓은 들판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곳이라 바람을 막아줄 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숲을 만들었다. 이런 목적의 숲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느티나무, 왕버들, 팽나무 등의 활엽수를 심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용문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겨울 바람이 문제였다.늦가을부터 불어대는 북서풍 칼바람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 안으로 사정없이 불어 닥쳤다. 그래서 깊이 뿌리를 박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으면서 무리지어 살기를 소나무가 제격이었다.

 

사실 이곳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무덤이 있을 만큼 오래된 마을이니, 아주 옛날부터 숲은 수호신처럼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을 터이다.그러나 구한말 나라가 어수선해지면서 수천 년을 지켜온 솔숲은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 1863년 동학의 접주 최제우가 체포돼 처형되는 혼란기에 민심이 흔들리면서 큰 나무들이 잘려 나가는 등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892년 7월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진다.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러시아인이 주인인 금광회사의 광부들 몰래 금을 캐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금을 캐는 것 자체보다 배 모양의 마을을 굳게 붙잡아 맬 닻의 역할을 할 오미봉을 파헤친 것에 더욱 격분했다. 마을의 양반들은 하인들을 시켜 광부들을 쫓아내려다가 사람이 몇 죽으면서 30여 명이 관청에 잡혀가고 만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하인들을 구출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숲의 소나무를 베어 충당했다. 그 결과, 숲이 온통 쑥대밭이 돼 버렸다.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은 1895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관직을 버리고 금당실로 내려온다. 그는 이곳에 95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솔숲 다시 가꾸기에 정성을 쏟는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사산송계(四山松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숲 가꾸기에 동참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리미가 의연하게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안동 진성이씨 종택 뚝향나무

 

안동에서 35번 도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청머리재란 고개다. 고개 넘어 중앙선 철로 밑을 지나 주유소가 있고 '진성이씨 종택' 입구라는 간판이 나온다. 거기에서 좌회전해서 5km 쯤 더 가면 진성이씨 종택(宗宅)이 있다.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이 두루 편안하다고 해, 지금은 두루 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의 동남쪽 아늑한 야산을 뒤로 두르고, 작은 개천을 앞에 놓고 펼쳐진 고색창연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모인 곳이 바로 진성이씨의 종가집이다. 대지 760평에 사당과 본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전통 기와 건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당으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경류정(慶流亭)'이 종택의 대표 건물이다. 성종 23년(1492)에 세웠으며 퇴계가 이름을 짓고 액자를 달았다고 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경류정의 바로 앞에는 마치 널직한 이불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뚝향나무 한 그루가 고가의 운치를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둑이나 우물가 등 주로 수분이 많은 곳에 흔히 심는 이 나무는 자람의 모양새가 보통 향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줄기가 비스듬하게 자라거나 여러 개의 줄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키도 크지 않거 가지도 비스듬히 뻗어, 전체 모양이 편평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 뚝향나무는 줄기가 땅에서부터 꽈배기 모양으로 꼬여서 올라가다가 1.3m 높이에서 기괴한 모양의 여러 가지가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사방으로 펼친 가지의 무게를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탓에 16개의 기둥을 세워서 나뭇가지를 받치고 있다. 나무의 키는 불과 3.2m, 가슴 둘레는 2.3m, 가지 펼침은 동서 14.7m, 남북 12.2m 정도이다. 특별히 향이 강해 제사 향으로 애용됐으며 주변에 벌레가 잘 모여들지 않는다고 한다.

 

 


변방에 살다간 자의 넋인 듯

울릉도 통구미 향나무

 

조선 정조 18년(1794)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은 월송만호 한창국을 시켜 울릉도를 조사한 내용을 조정에 보고한다.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정기 조사였다.

 

'4월 21일 배 4척과 80명의 병사를 싣고 출발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한 척을 잃어버리고, 23일경에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 지금의 태하리) 에 상륙했습니다. 산에 올라 살펴보니, 오른편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었습니다. 한 해 걸러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 지고 있었습니다. 24일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았습니다.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 속에 있는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 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해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가 온통 절벽이며, 자라는 나무로는 향나무, 잣나무, 황벽나무, 솔송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 아욱, 쑥, 모시풀, 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향나무 두 토막을 올려보냅니다.'라고 했다.

 

불과 1백여 년 전 구한말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이름 그대로 정말 '숲이 울창한(鬱) 언덕(陵) 섬'이었다. 울릉도 숲의 벌채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다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가 버렸다.

 

 


귀신은 썩 물러가라

창원 신방리 음나무

 

마산과 김해를 잇는 4차선 국도 14호선의 중간쯤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로 올라가는 1,015호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거기서 약 2km쯤 북으로 올라가면 왼편에 신방초등학교가 있고, 음나무는 학교 뒤 편 도로와 인접한 야산의 산비탈에 자란다. 음나무와 엄나무 양쪽을 다 쓰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음나무다. 엄나무란 가시가 날카롭게 달려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음나무는 원래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는 '벽사(辟邪)나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음나무 가지를 방 문 문설주나 대문 위에 걸어두고 잡귀를 쫒아내고자 했다. 험상궂게 가시가 듬성듬성 나 있는 음나무 가지를 귀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저승사자가 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고 다니듯이 잡귀도 도포를 입고 다닌다고 상상한듯 하다. 음나무 가시는 도포 입은 귀신이 신경 쓰이는 부분, 즉 도포자락을 걷어 올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 좋아할 이 없다. 귀신이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신이 싫어하는 나무에는 음나무를 비롯해 무환자나무, 복사나무 등이 있다. 반대로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에는 느티나무 등의 정자나무와 버드나무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자라는 4그루의 음나무 고목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키 15.4~9.1m, 가슴높이 둘레 3.2~3.7m의 범위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 15.6~13.2m, 남북 11.2~18.1 정도이며 서로 가지가 맞닿아 있다. 자람 터의 경사가 너무 급해 비가 올 때마다 흙이 흘러내려 붉은 황토가 드러난 상태로 있다. 최근 여러 가지 조치를 했지만, 큰 비가 오고나면 여전히 땅이 패일 정도로 척박하다. 그러나 나무는 잘 버티고 있다.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의 백성 사랑

하동 송림

 

남해 노량에서 출발한 황포돛대를 매단 장삿배는 섬진강을 따라 올라왔다. 풍부한 물산이 모여드는 하동장에서 한 몫을 단단히 잡고 다음날이면 '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화개장터'에서 80리 하동포구 장삿길을 마감했다.

 

당시로서야 고달픈 생활전선의 길고 긴 뱃길이었지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낭만과 꿈이 있는 물길이었다. 이 길의 한 가운데, 하동읍을 감아도는 섬진강가의 넓은 백사장을 따라 띠처럼 이어진 송림(松林)이 있다. 국내 최대의 이 토종 소나무숲은 조선 영조21년 당시 하동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처음 조성했다. 그는 민초들의 아픔을 아는 목민관이었다. 처음 부임한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섬진강의 모래톱과 푸른 강물이었다. 이곳을 다스려야 하동읍이 편안해지리라는 것을 아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막대한 품이 드는 흙과 돌 제방만이 물길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친화적인 제방을 만들자고 외쳤을 터이다. 이렇게 시작한 솔숲 만들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때 1천 5백 그루에 이르렀다. 지금도 50~300년생의 9백여 그루가 너비 30여m, 길이 2km에 이르는 푸른 띠를 만들고 있다.

 

송림은 멀리 광양만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을 막고, 홍수로 넘어오는 물을 막아자누느 다목적 숲이었다. 개개의 소나무는 소년나무와 노인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생태적인 안정성'이 뛰어나다. 또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듯 구부러지고, 비틀어지고, 때로는 서로 기대기까지 한 나무의 모습들은 전체적으로 평안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백사청송(白沙靑松)이란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아름다운 솔숲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