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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春士) 김동인(金東仁) / 감자

오늘의 책 2011. 5. 15. 16:55 Posted by 따시쿵
춘사(春士) 김동인(金東仁 : 평안남도 평양  1900.10.02~1951.01.05)은 평양에서 대지주이며 교회 장로인 김대윤을 아버지로 3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12년 기독교 계열인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듬해 이 학교가 폐쇄되자 명치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였다. 191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카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한 김동인은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쌓기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주용한, 전영택,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 문예 동인지 <창조>를 자비로 창간한 김동인은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3월에 미술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독립을 바라는 유인물을 작성한 탓으로 투옥되기도 한 김동인은 <창조> 9호에 스스로 본격적인 단편이라 부른 <배따라기>를 발표함으로서 단편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였으며 <목숨>, <연산군>, <딸의 연을 이으리> 등의 작품을 속속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점점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고 결혼 뒤의 권태와 명월관 기생과의 동거 등으로 생활은 점점 방태해졌다. 그 후로 김동인의 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였다. 수리사업, 영화 흥행업에 뛰어들었다가 고스한히 돈만 날렸다. 이에 못이겨 아내가 일본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그를 패바의 늪에서 구해준 것은 소설이였다. 김동인 1926년 이후 3년 동안이나 작품활동을 잇지 못하다가 1929년에 다시 창작에 몰두하여 장편 <젊은 그들>을 시작으로 <광염 소나타>, <광화사>, <발가락이 닳았다>, <운현궁의 봄>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아내의 가출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심해진 불면증을 치료하느라 마역과 약물을 복용하다 그만 중독증에 걸리고 말았다.

겨우 중독증을 고친 김동인은 다시 창작 활동에 몰두하여 1934년에 유명한 평론 <춘원연구>를 발표하여 이광수의 문학세계를 비판하였으며 1939년에는 중편 <김연실전>을 발표하였다. 박영희, 임학수 등과 만주를 다녀왔으나 일본군이 종군기를 집필하라고 하자 기억력이 흐려졌다며 모조리 거절했던 김동인은 1942년 잡지 <삼천리>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가 천황불경죄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김동인은 다시 창작활동을 개시하였으나 뇌막염으로 중단하였으며 1951년 1월에 홍익동 자택에서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김동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그는 여행, 낚시, 화초재배에 능했으며 경마, 마작에도 보통이 넘었고 레코드 수집, 사진 촬영 등 당시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취미를 즐겼다.



무능력한 남편과 극도의 가난이라는 환경은 주인공 복녀의 도덕의식을 파괴한다.
일제하 민중의 궁핍함이 마침내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까지 초래한다는 사실도 당대 사회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열 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여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서방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이십 년이나
        위로서,.........................

15세 소녀가 돈에 팔려 시집 간 부분....

        복녀의  송장은 사흘이 지나도록 무덤으로 못 갔다. 왕서방은 몇 번을 복녀의 남편을 찾아 갔다. 복녀의 남편도 때때로 왕서방을 찾아
        갔다. 둘의 새에는 무슨 교섭하는 일이 있었다.

복녀가 낫을 들고 왕서방을 죽이려하다 도리어 죽음을 맞이 했어도 그의 남편은 어린 부인의 죽음을 돈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는 반전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