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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9 옥한흠 / 안아주심 (1)

옥한흠 / 안아주심

오늘의 책 2012.03.29 17:34 Posted by 따시쿵

광야 같은 인생길 눈물로 걸어도
하늘 아버지의 넒은 가슴에 안긴 자녀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깊은 슬픔에 잠겨 눈물조차 말라 버렸어도
꿈조차 가난하여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그 품에 안기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촉촉이 젖어오는 행복이 있기에...


인생을 살다보면 종종 혼자 걷는 길처럼 막막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눈동자는 당신을 주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따뜻한 품은 우리를 꼬옥 안고 계신다. 『안아 주심』은 세상이 힘겹고 삶이 두려운 이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안아 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옥한흠 목사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걷는 인생길에서 발견하게 될 참 기쁨을 소개한다. 30여 년 목회 생활을 통해 성도들과 함께 고난과 승리의 삶을 경험한 그이기에, 지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전하고자 그간의 설교를 묶은 것이다. 그의 글은 고통에 담긴 영적 원리를 밝혀주어 인생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자유함을 얻게 한다. 힘들 때일수록 붙잡아야 할 기본기를 다져주어 삶을 지탱할 힘을 얻게 한다.


세상살이는 참으로 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이 그 마음에 흘러넘친다. 저자는 바로 이 비밀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눈물 흘리는 이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본 사람이야말로 삶이 곤고한 이들에게 아버지의 그 품을 전해 줄 수 있기에. 


<안아주심>은 위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며, 현실의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아 주심을 능동적으로 누리는 삶이 아니겠는가.


옥한흠(玉漢欽)

제자훈련에 인생을 걸었던 광인(狂人) 옥한흠. 그는 선교 단체의 상징인 제자훈련을 개혁주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 지역 교회에 적용한 교회 중심 제자훈련의 선구자이다.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후, 줄곧 '한 사람' 철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사랑의교회는 지역 교회에 제자훈련을 접목해 풍성한 열매를 거둔 첫 사례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국내외 수많은 교회가 본받는 모델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6년도부터 시작한 '평신도를 깨운다 CAL 세미나'(Called to Awaken the Laity)는 20년이 넘도록, 오로지 제자훈련을 목회의 본질로 끌어안고 씨름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이론과 현장을 동시에 제공하는 탁월한 세미나로 인정받고 있다. 


철저한 자기 절제가 빚어낸 그의 설교는 듣는 이의 영혼에 강한 울림을 주는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났다. 50대 초반에 발병하여 7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괴롭혔던 육체의 질병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하도록 이끌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파고드는 다양한 이슈의 주제 설교와 더불어 성경 말씀을 심도 깊게 다룬 강해 설교 시리즈를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혀준 그는, 실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성경 해석자요 강해 설교가였다. 


설교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신실하고자 애썼던 그는 한목협(한국목회자협의회)과 교갱협(교회갱신협의회)을 통해 한국 교회의 일치와 갱신에도 앞장섰다. 그리하여 보수 복음주의 진영은 물론 진보 진영으로부터도 존경받는,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목회자이기도 했다. 


고(故) 옥한흠 목사는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으며 성균관대학교와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의 캘빈신학교(Th. M.)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동(同) 신학교에서 평신도 지도자 훈련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D. Min.)를 취득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제자훈련의 공로를 인정받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여하는 명예신학박사 학위(D. D)를 받았다. 2010년 9월 2일, 주님과 동행했던 72년간의 은혜의 발걸음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너른 품에 안겼다. 


생전에 그가 집필한 교회 중심의 제자훈련 교과서인 『평신도를 깨운다』는 100쇄를 넘긴 스테디셀러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 외 대표 저서로 『고통에는 뜻이 있다』 『안아 주심』, 성경 강해 시리즈 『로마서 1,2,3,』 『요한이 전한 복음 1,2,3』 등 다수가 있다



나인 성 여인

그 후에 예수계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고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 복음 7:11 - 17

관을 따라 쭉 이어진 장례 행렬 속에 울고 있는 한 여인이 보입니다. 갈리리 바닷가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가면 나오는 골짜기가 있는데, 바로 그곳에 자리 잡은 나인 성에서의 일입니다.

그 아름다운 동네에서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처녀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겠죠?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재롱부리는 것을 보면서 젊은 부부가 살아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행복한 앞날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부푼 꿈에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했던 이 여인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과는 달리, 당시에는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혹독한 고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겠습니까? 그래도 그녀에게는 한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생인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 "청년아" (누가복은 7:14) 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한 아들을 보며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큰 꿈에 부풀었겠습니까? '이제는 가정에 기둥이 생겼구나.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어'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음에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아들마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그녀의 모든 꿈이었던 아들마저 잃은 설상가상릐 화를 당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그녀는 울고 싶어도 더 짜낼 눈물이 없을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속으로 '이 여자, 무슨 죄가 많길래 이렇게 팔자가 사납담? 남편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떠나 버렀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시체를 마루에 눕혀 놓고 머리를 반듯하게 빗겨 줍니다. 그런 다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갈대로 정성껏 만든 관에다가 시체를 누이고는 두 손을 꼭 모아 놓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입관 절차입니다. 장례식은 당일에 치릅니다. 하룻밤을 더 보내지도 않고, 오후 5시나 6시쯤 되면 죽은 자가 누워 있는 관을 메고 나갑니다. 장례 행렬의 맨 앞쪽에는 여자들을 세웁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는 여자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들은 관을 메고 그 뒤를 따라 갑니다. 또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따라 갑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한 20,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청년의 장례 행렬이 동네를 지나 성문 밖으로 뻐져나갑니다.


울지 마라

이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죽음의 사신인 사탄이 이끄는 죽음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칩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과연 생명과 죽음의 대결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대결입니가!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 과연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하셨을까요? 아니면 청년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비켜서서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면 대결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관 뒤를 따라오며 슬피 우는 과부에게 머물럿습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먼저 주목하셨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실패한 자들입니다. 병든 자들입니다. 4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보셨다'는 말이 한 40번 정도 나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은 먼저 이 과부를 보셨습니다.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에 민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의 만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만조를 이루면 온 해변이 바닷물로 덮이는 것처럼 우리를 향한 만조를 이룬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덮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 이 여인이 얼마나 슬플까,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과부의 처지를 다 알고 계셨고, 과부의 괴로움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주님이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을 당한 사람을 볼 때, 자기도 모르게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위로입니다. 그 고통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빈말로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비슷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너의 자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 31:16-17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울지 말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이에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메고 가던 자들이 그 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관속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과부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근본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

나인 성 과부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고 비탄에 잠긴 과부와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예수님이 당장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나인 성 과부와 같은 일이 지금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알려 주시고자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도 그냥 기록해 놓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문 앞에서 죽음의 사자들과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사자들 앞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냥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시요,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이 사건의 주된 목적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온 세상을 향해서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고 선언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누가복음 7 :14)하고 외치셨고, 바로 그때에 죽었던 자가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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