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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선집 / 새벽에 홀로 깨어

오늘의 책 2012. 8. 21. 11:58 Posted by 따시쿵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신라 말의 문장가 · 학자. 경주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得難)’ 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駢)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 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 · 장(狀) · 서계(書啓) · 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内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 장 · 격(檄) · 서(書) · 위곡(委曲) · 거첩(擧牒) · 제문(祭文) · 소계장(疏啓狀) · 잡서(雜書) · 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고운(顧雲) ·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새벽 풍경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곧은 길 가려거든


어려운 때 정좌(正坐)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난 걸 어찌 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얻다 말하고


세상 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혼자 사는 중에게


솔바람 소리 빼곤 귀가 시끄럽지 않은 


흰 구름 깊은 곳에 띠풀로 지붕을 지었네


세상 사람 여길 알면 한스러우리


돌 위의 이끼가 발자국에 더럽혀질 테니.




가슴속 생각을 적다


세상만사 어지럽게 얽혀 있고


근심과 즐거움 또한 다단(多端)하려라.


부자도 만족하지 않는 듯하니


가난한 자가 어찌 안분자족(安分自足)을 하리.


통달한 이라야 영예를 버리고


초현히 홀로 올바로 보지.


누가 말했나, 허리 굽히는 일 부끄러워


산수간(山水間)에 일찍 들어가겠노라고.


힘써 농사지으면 또한 거두는 게 있어


기한(飢寒)은 거의 면할 수 있지.


평지에서도 풍파가 일고


평탄한 길에서도 험난한 일 생기네.


세상과의 사귐 사절했으니


세상 일이 어찌 나를 괴롭히겠나.


농부가 때때로 찾아오나니


농사일 이야기하다 웃기도 하네.


가고 나면 산에 지는 해를 요량해


고용히 사립문을 닫네.


지음(知音)이야 세상에 하나 없지만


아서라, 한탄해 무엇 하겠나.




피리 소리를 듣고


인생사란 흥했다 쇠하게 마련이니


부질없는 삶 참으로 슬프구나.


뉘 알았으리, 저 천상의 곡조


이 바닷가에서 연주하게 될 줄을.


물가의 전각(殿閣)에서 꽃구경하실 때 연주했었고


바람 부는 난간에서 달 보실 때 연주했었지.


이제는 선왕을 뵐 수 없으니


그대 좇아 눈물만 줄줄 흘리네.




멀리 타향살이 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도 표현했고, 당시 시대상으로 사회에 변혁을 이룰 수 없어서 막막해 하는 그래서 산천을 소요(逍遙)하는 한 선비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책 내용이다. 그리고 시, 산문, 창작글을 따로 단락을 두어서 읽는 사람들이 편하게 읽게 구성이 되었다.

시조나 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옛조상들에 대한 생활상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책은 자세한 설명을 붙여줌으로써 이해도를 높였다.

천재라는 단어를 항상 수식어처럼 달고 사람도 범부(凡夫)와 같이 고뇌하고 범민하는구나. 아니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 이책은 그런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