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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 정조 사후 63년

오늘의 책 2012.10.03 18:25 Posted by 따시쿵

박현모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정조의 성왕론(聖王論)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로 유교 정치의 핵심어인 성왕론을 통해서 조선조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해 1999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 내지 ‘국왕의 리더십과정’에 관한 좋은 텍스트로 보면 전혀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고 말하는 저자는 ‘텍스트로서 역사읽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아직도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세종실록》을 강의하는 꿈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및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으로 세종실록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을 강의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의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06 광주비엔날레 전시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정치가 정조(正祖)』 (2001), 『현대정치학』,『마인드맵으로 본 국제정치학』등이 있고, 역서로는『몸의 정치』(2000, 정화열 지음)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공저) 『정조 사후 63년』등이 있으며, 「세종의 공론정치」 「경국대전의 정치학」 「정약용의 군주론」 「Max Weber의 정치가론 연구」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치성」, 「정조의 정치현실 인식과 권도론」등 5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제1부  세도정치기 이전의 조선정치

 

조선왕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일본, 영국 등의 다른 왕조들의 평균수명(200 ~ 300년)의 두배 정도의 수명을 유지했다. 조선왕조가 장기 지속된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살펴보면 그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상유(相維)와 상제(相制)" 내지 "정당의 쟁의(爭議)"로 표현되는 '제도 안의 상호간 견제장치' ② 국왕이 정치를 잘못 했을 때 왕조를 바꾸지 않고 왕실의 다른 후보로 대체한다는 '반정(反正)의 정권교체 방식' ③ 중국 왕조와의 사대관계에 따른 대내외적 안전보장과 한반도의 지리학적 위치 ④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공론정치라는 정치 운영방식이다.

 

경국 또는 비슷한 의미의 경세(經世)라는 말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이나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의 저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국가경영 내지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가리킨다. 실제로 경국의 사유와 제도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에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퇴율성리학 이후 유학자들의 관심이 '정치체제의 구성'에서 '우주원리와 인간의 마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좋은 정치란 효율적인 제도가 아니라 위정자들의 도덕적 전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경국대전]이 만들어질 때까지 조선의 유학자와 위정자들은 좋은 제도를 구상하고 그들의 경국적 사유를 저술하는데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았다.

 

 

제2부 세도(勢道)정치기의 정치와 외교

 

순조시대(1800 ~ 1834)의 정국 운영방식과 언론의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세도정치'의 특징과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선 세도의 의미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세도정치의 일차적 의미는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세도가에 의해 자행되는 국권농단(弄權)'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것이다. 국왕이 주공(周公) 같은 군자(君子)에게 세도(世道)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총신 또는 척신에게 권세를 맡겨 오히려 세상의 도의를 망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세도정치는 조선왕조의 경우, 명종 때의 윤원형 일가나 정조 때 홍국영의 과두독재에서 있듯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세도정치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해는 국왕의 특별한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을 받은 외척에 의한 국정운영이라는 의미이다. 경주김씨,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국왕과 외척관계를 맺은 특정 가문의 의한 정국의 배타적 운영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세도정치는 정조로부터 연유한다. 즉 정조 말년에 "국왕의 깊은 지우를 입어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 ㅈ좌하는 책임을 부탁받은" 김조순의 존재가 그것이다. 실제로 [순조실록]은 정조가 김조순에게 세도를 위탁했으며, 김조순도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업무를 돕고 백관(百官)을 총찰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년"이였다고 자평(自評)하고 있다.

 

 

제3부 세도정치기 이후의 조선정치

 

조선왕조는 언제 왜 패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압적인 패망했다"일 것이다. 그런데 첫째 사항인 '언제' 즉 패망의 시기와 관련해서 1897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해 10월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은 '왕'에서 '황제'로 격상되었고, 국가의 명칭이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 정체와 국체 역시 [대한군국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면서 "505년간 지속된 조선왕조는 종언을 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1905년 11월의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을 중시하는 시각도 있다. 서재필은 "1905년까지 한국은 독립된 왕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종 역시 조약의 인준을 강용하는 이또 히로부미에게 "이 조약을 인준한다면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짐은 사직을 위해 죽을지언정 결코 허가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고, 결국 이또 히로부미는 그 다음 날 고종이 불참한 가운데 대신들의 날인을 받아 조약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가 망했다고 보는 근거로는 일본에 의해 ① 모든 외교권이 박탈당했고(1~2조) ② 통감(統監)에게 국내 통치권마저 빼앗겼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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