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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저 마이티 / 이것이 성공이다

오늘의 책 2013. 10. 28. 08:08 Posted by 따시쿵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목사이자 저술가였다. 18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버그에서 태어났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1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 교회에서 44년간 목회를 했고, 그 중 31년을 시카고의 '남부 동맹 교회'에서 시무했다.


경건시와 신비주의적인 찬송, 에머슨과 셰익스피어의 글을 좋아한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풍성하고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절충하여 타협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이나 십자가 없는 성공 처세술을 전하는 것은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나님을 추구함』,『경건 생활의 기초』,『패배를 통한 승리』,『하나님을 바로 알자』『거듭난 자의 생활』,『경건 생활의 기초』,『경건 생활의 비결』,『예수 방향으로 가라』등이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을 하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는 '이 시대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제약을 지니게 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이 시대정신에 물들지 않을 수 없다. 탐욕에 기반을 둔 무한경쟁의 살벌한 정글 법칙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세뇌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야망 실현을 '비전'의 미명으로 정당화하고 기도응답으로 호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의 출세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추구한다는 출세 방식 사이에 과연 다른 점이 있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양이 이리를 벤치마킹하여, 자신의 발톱을 날카롭게 기르고 송곳니를 부지런히 숫돌에 갈아 드라큘라의 이빨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기형(奇形) 양이 되면 이리를 이길 수 있는가? 오히려 달아나는 데 지장을 초래하여 더 빨리 잡아먹히고 만다. 양으로 부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리)의 성공법칙으로 무장하는 것이 바로 이 기형의 웃기는 양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하나님은 이리의 방식이 아니라 양의 방식으로 평천하(平天下)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니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食物)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聖山)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5:25).

 

토저는 이 책에서 바로 양의 이러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성공 방식에 대해 천명하고 있다. 이 시대의 선지자 토저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찬 메시지를 들어보라!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

 

 

 

예수님을 알기 위해 지불할 대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름답고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는 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땨문에 그들은 그렇고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악한 것들을 삼가는 것으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다. 더러운 것, 해로운 것, 추잡한 것을 삼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음란하고 죄악된 것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소극적으로 어떤 것들을 섬기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끝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유감그럽게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나쁜 것들'뿐만 아니라 '좋은 것들'도 버렸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라고 말했다. 본래 그의 권리에 속하는 것, 그에게 유익이 되는 것, "누가 뭐래도 이것은 내 것이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내가 이것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는 기꺼이 포기했다. 바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말이다.

 

"나는 내게 좋은 것들까지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지혜와 아름다움과 진리와 영생의 근원이요 샘이시다. 그분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버리지 못하고 집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평안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적 평안을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늘 고난에 노출되었으며, 심지어는 3주 동안 밤낮 풍랑에 밀려 바다를 떠돌기도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어떤 것에도, 심지어 우리의 목숨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에 집착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보화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즐거운 삶에 악세서리처럼 첨가되어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매력에 무한히 빠져들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바울은 지금으로 말하면 박사 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많은 학식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고백을 들어보자!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똑똑히 기억하라. 왕족이든 사대부 집안이든 모든 혈통은 부패했다는 것을! 나는 귀족 출신이든 빈민굴 출신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 지식, 외모, 능력을 자랑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성공'과 '출세'라고 생각한다. 정신 차리라.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고작해야 현대의 기독교는 "도박을 하지 마라. 안 그러면 패가망신할 것이다. 술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노숙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나는 이런저런 저질스러운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나는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그런 것들을 끊을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양심적 유대인으로 살아온 그가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 술을 끊었습니다."라고 간증하는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귀한 간증이요, 선한 일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기본적인 것에 머물면서 "나는 이런저런 것을 하지 않는다"라고 자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처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폿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라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홀로 거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건강과 생명까지 주님께 드려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건강을 주님께 바쳤다. 내가 나의 사명을 다 완수했다면, 내가 굳이 이 헛된 세상에 더 머물 이유가 무어이겠는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어찌하여 늦가을의 마지막 잎새처럼 처량하게 매달려 있어야 하겠는가?

 

당신의 건강을 주님께 드려라. 그리고 당신의 생명마저도 드려라. 사람들은 주님께 그들의 생명을 드리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아는 한 목회자가 있는데, 의사가 그에게 "당신에게 협심증이 생겼습니다. 잘 관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훌쩍이더니 캘리포니아로 가서 은퇴하였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목회자가 있는데, 그 역시 협심증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괜찮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말한 후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의 아내가 일어나 그를 깨우려고 했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떠난 자리에는 미남(美男)이며 키가 큰 그의 육신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호흡까지 주님께 드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는 말대로 살다가 죽었다.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았다. 그는 "죽기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은 의연(毅然)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라.

 

당신의 날이 얼마나 길어질이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을 주셨다. 첫 째는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6 하)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하)라는 말씀이 있다.나는 이 두 말씀에 의지하여 이제까지 살아왔다.

 

 

순교를 자청한 그리스도인

 

나의 이런 교훈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런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사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저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가는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 가려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주님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지 말라. 주님은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을 때 그분은 그것을 다시 돌려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좋은 예가 스탬 선교사 부부의 경우이다. 존 스탬(John Stam)과 베티 스탬(Betty Stam)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은 나 부부를 야외로 끌고 나가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선교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소."

"그래? 그러면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어라."

스탬 부부는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었고, 날카로운 칼이 그들의 목을 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마이더스(Midas)와 세상의 모든 왕들과 모든 구두쇠들보다 더 부유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도인들이 박해당하여 죽었던 로마 시대의 일이다. 한 성도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고 싶은 열망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주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입니다. 나는 주님께 내 목숨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면류관들 위에 이 '순교의 면류관'을 올려놓고 싶습니다. 나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개입한다면 나는 순교를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제발 개입하지 말아주십시오. 권세자를 찾아가서 선처를 호소하지 마십시오. 나는 늙은 사람이며,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내가 이 '순교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이 성도의 친구들은 개입하지 않았고, 로마 당국은 사형을 집행했다. 감사하게도, 결국 이 신앙의 위인은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영적 거인(巨人)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위대한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주(主)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나의 나라는 사라지고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간절한 소원이 그 비결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내 마음속의 보좌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세 가지 준칙

 

인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인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완고한 세대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 그들은 장차 도래할 세상의 멸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헌 사람들은 조언(助言)을 원할 것이고, 나는 바로 그 조언을 해주고 싶다. 완전한 사람의 조언은 아니다. 다만 이런 사람들을 돕겠다는 일념(一念)을 가진 사람의 조언이요, 오랜 세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다.

 

당신은 이 완고한 세대에서 구출 받기를 원하는가?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이 허망한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의 삶을 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를 행하라.

 

첫째,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말하라.

둘째, 육신을 억제하라.

셋째, 단순하게 살아라.

 

이것은 다음 성경 구정들의 교훈이기도 하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廣大)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라.....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5, 22)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3)

 

 

내게 송곳을 주신 하나님

 

몇 년 전 하나님은 내게 날카로운 송곳을 주시면서 "아들아, 교만하게 부풀어 오른 네 자아(自我)에 구멍을 내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송곳으로 내 자아를 찔렀으며, 바람이 '쉿' 소리를 내며 내 자아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불평의 소리가 들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과대 포장되어 부풀어 올랐던 내가 본래의 나 자신으로 작아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과대 포장된 자아를 훌훌 벗어버리는 것이 즐거웠다.

 

젊었을 때 나는 총 쏘기를 아주 즐겼다. 22구경 회전식 연발 권총을 즐겨 사용했다. 한가한 시간에 재미 삼아 친구와 함께 야외로 나가 표적을 만들어놓고 총을 쏘았다. 우리는 그 표적을 '진흙 닭'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진흙을 닭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가 그것에 깃털들을 많이 꽂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우리가 깃털을 꼿꼿이 세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로는 얼마나 작은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과대 포장되어 있는가!

 

명심하라. 허세적(虛勢的)인 깃털들을 다 뽑아버리고 본래의 크기로 작아지지 않는 한 결코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신 자신을 부인하라.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어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이 당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믿어라. 그리고 이 믿음대로 살라.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원한과 분노가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화를 잘 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노라고 자랑한다. 그들은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이며 완전히 속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죽일 것이며,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도 기쁨도 열매도 유익도 승리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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