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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

오늘의 책 2012. 10. 3. 08:45 Posted by 따시쿵

오주석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 평가받은 그는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으며, 한국 전통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이다. 2005년 2월 49세의 나이에 혈액암과 백혈병을 얻어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쳤다.

 

그는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고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도록 가르쳐준다. 그림 속에서 무심히 지나칠 선 하나, 점 하나의 의미를 일깨우며 그림의 진정한 참맛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98년에 <단원 김홍도>로 시작된 그의 저술은 계속 이어지면서 옛 그림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학계에서는 그에 대해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 고증으로 회화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고 평가한다. 1995년 김홍도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 특별전'을 기획해 주목받았으며, 저서로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단원 김홍도』『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및 유작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 있다.

 

오주석은 “우리 옛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며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연을 해왔다. 그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는 옛말을 인용하며, "감상은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인 만큼 마음 비우기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대표작 『단원 김홍도』에서는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세 층위에서 당대의 화가 가운데서도 여러 방면의 그림을 가장 잘 그리고, 게다가 글씨까지 잘 쓴 서화가의 면모, 시를 잘 짓고 악기를 잘 다룬 풍류인의 면모, 그리고 사람 됨됨이가 호쾌하면서 일방 섬세한 선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 문일평 선생은 그를 일러 '그림 신선'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예술의 드높고 아득한 깊이를 말한 것이지만, 나아가서 그의 생김생김이나 인품, 그리고 초탈한 생활의 모습이 신선 같았다는 조희룡의 전기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김홍도의 작품 속에서 시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읽어내고 또한 그 자신과 스승 강세황의 여유롭고 해학적인 기질과 그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뛰어난 철인군주 정조의 훌륭한 예술적 안목과 위민정치의 양상을 읽어낸다.

 

 

 

1. 호방한 선線 속의 선禪 - 김명국의 <달마상>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은 화원 화가이며 성품이 호탕해서 얽매인 데가 없었고 거리끼는 것 또한 없없다. 그가 엄청난 술꾼이였다는 것은 '취한 늙은이'란 뜻의 별호(別號) 취옹(醉翁)으로 짐작된다.

 

달마는 누구이고 김명국은 누구인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렸는가, 달마가 김명국을 시켜 자신을 그리게 하였는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린 것은 관지(款識)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자장(磁場)은 선사(禪師) 달마가 김명국에게 자신을 그리게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의 진실이다. 그림의 필선(筆線)들은 화면 위에 각각 서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가? 선과 선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필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이 그것이다. 그것은 옷주름 선뿐만 아니라 얼굴선, 그리고 관서 글씨의 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기의 주인공은 김명국인가, 달마인가?

 

 

 

2. 잔잔하게 번지는 삼매경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강희안의 호, 인재(仁齋)부터가 '어진 이의 서재'로 읽히거니와, 그와 절힌했던 서거정(徐居正)은 한마디로 그를 가리켜 "사람됨이 재주 많고 덕이 있어 참으로 대인군자였다(爲人有才有德 眞大人君子也)"고 평한 적이 있다. 그의 어질고 고요한 성품은 강희안이 남긴 유일한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바로 꽃나무 키우는 요령과 감상법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도 엿볼수 있다. 

 

강희안은 풍류와 문장으로 이름난 명문가 출신이었다. 부친이 세종대왕과 동서간이었으므로 자신은 대왕의 처조카였으며, 부친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나라의 활자 글씨본을 두 차례나 썼고 문장도 뛰어나서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였다. 스스로 부지런히 도모하지 않고 나약하고 둔중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질 덕에 벼슬은 저절로 높아져 집현전 직제학까지 올랐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한 물 위에도 결이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속을 스쳐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 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잡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서는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물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생성을 이루는 바탕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은 관자(管子)의 수지(水地)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여, 아름다움과 추함, 어짊과 못남, 우둔함과 현명함을 낳는 장본이다.(水者何也 萬物之本原也 諸生之宗室也 美惡賢不肖愚俊之産也)"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다스려 교화시킬 때 그 해답은 물에 있다. 물이 한결같으면 사람들 마음이 바르게 되고, 물이 맑으면 민심이 편안해진다. 한결같으니 더러운 욕심을 내지 않고, 민심이 편안하니 행실에 삿됨이 없다.(是以聖人之化世也 其解在水 故水一則人心正 水淸則民心易 一則欲不汚 民心易則行無邪)" (관자)는 이어서 물이 가지는 주된 미덕과 갖가지 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물은 얼핏 겉으로 보면 여러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손으로 떠보면 한결같이 투명하다. 그 투명한 무색은 온갖 빚깔의 바탕이다. 그 깨끗함은 세상의 모든 더러움까지 씻어내린다. 그래서 옛 여인네들은 장독가에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일원성신께 각자 품은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물은 큰 절과 대성당에서 그대로 성수가 되고 지극히 고귀한 종교적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수가 되는 이치는 여염집 아낙네의 정한수와 똑같다. 물은 또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흐르지만 일단 수평을 이루면 멈춘다. 지극한 외로움이다. 그리고 물의 맛은 담담하니, 그것은 온갖 맛의 중용을 얻은 것이며 그 담담함은 바로 군자의 마음이다. 

 

 

3. 꿈길을 따라서 - 안견의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대왕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서른 살 되던 해(1447년) 어느 여름날 밤에 ,'꿈에서 노딜었던 도원을 그린 그림'이다. '도원桃源'이란 옛적 중국에서 길을 읽은 한 어부가 이상한 복숭아나무 숲에 이르러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맞닥뜨렸던, 꿈결 같은 이상향을 말한다. 유명한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보이는 '별유천지 비인간'이란 구절은 바로 그곳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 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무릉도원은 원래 중국의 자연시인 도잠陶潛글(365~427) [도화원기]에서 비롯한 말이다. <몽유도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므로 먼저 전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무릉 땅 사람 하나가 고기잡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강물을 따라 고기를 잡다가 길을 잃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가 없는 중에 홀연히 복숭아 꽃나무 숲을 만났다. 냇물 양편 기슭은 수백보나 되는데 다른 잡목은 없고 향기로운 풀만이 깨끗하고 아리따웠으며 날리는 꽃이파리가 어지러웠다.

 

어부는 매우 이상히 여겨 좀더 앞으로 가면서 그 숲이 끝나는 곳까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숲이 다하자 물의 연원淵源을 이루는 산 하나가 나타났다. 그 산에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그 뒤에서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리고 굴을 따라 들어갔다. 처음엔 매우 좁아서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날 만하더니 다시 수십 보를 더 가니 훤히 뚫리며 밣아졌다.

 

땅은 편편하고 넗은데 집들이 뚜렷하며 좋은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과 뽕나무와 대나무 들이 보였다. 또 길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과 개가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왔다 갔다 하며 씨 뿌리고 농사짓는 남녀의 옷 모양새는 모두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편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사실대로 갖추어 대답했더니 그 당장에 청하여 집으로 데려가서는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마련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와 캐물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 조상들이 진秦나라 시절 병란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가지 않았지요. 그래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영영 멀어진 겁니다." 하면서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 하고 묻는 것이다.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그 뒤의 왕조인 위진魏晋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들은 바를 일일이 자세히 얘기하자 사람들은 탄식하며 슬퍼했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이렇게 며칠을 머물다가 인사하고 떠났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오"하고 말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서 배를 찾게 되자, 어부는 곧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군에 이르러 태수를 뵙고 이 같은 사실을 말하였다. 태수는 곧 사람들을 보내 그를 따라가서 앞서 해두었던 표시를 찾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남양南陽에 사는 유자기劉子驥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마침내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나루를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도연명은 무릉도원이란 이를테면 일찍이 노자가 주장했던 "적은 국민이 모여 사는 작고 행복한 나라(小國寡民)"라는 영원한 이상향의 일례로서 동양 특유의 자연주의 사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무릉도원을 꿈에 보았다는 안평대군은, 자字가 청지淸之, 호號는 비해당匪懈堂 또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세종대왕은 '안평安平'이란 이름이 '편하고 무사하다'는 뜻으로 너무나 안이한 점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비해당'이라는 호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이것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증민편烝民篇에 보이는 "숙야비해夙夜匪懈 이사일인以事一人'에서 따온 말이니, "새벽부터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고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었다. 안평대군은 이렇듯 부왕父王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詩, 문文, 서書, 화畵, 악樂에 모두 능통하였다. 특히 당대에 제일가는 서예가였으므로 나라 활자인 경오자庚午字의 원본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풍류 왕자 안평대군이 우아하고 유려하기 그지없는 필치로 써 내려간 꿈의 내용은 <몽유도원도>에 이어지는 [몽원도원기夢遊桃源記]에 보인다.

 

 

정묘년 4월 20일 밤에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누우니, 정신이 갑자기 아뜩해지며 잠이 깊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문득 보니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핀 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오솔길이 숲 가장자리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을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이 하나 나왔다. 그는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하는 것이었다. 인수와 내가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 보니 절벽은 깍아지른 듯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다. 또 시내가 굽이지고 길은 꼬불꼬불하여 마치 백 번이나 꺽여나간 듯, 곧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골짝에 들어서자 골 안은 넓게 탁 트여 족히 2,3리는 될 듯했다.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 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했다. '바위에 나무 얽고 골짝에 구멍 뚫어 집을 지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 말한 게 아니겠나? 참말 도원 골짝일세! 그때에 옆에 누군가 몇사람이 뒤쪽에 서 있는 듯하여 돌아다보니, 정보貞父 최항崔恒과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등 평소 함께 시를 짓던 사람들이었다.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살펴보며 즐거워 하던 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시는 참으로 번화하니 이름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노니는 곳이요. 골짝이 다하고 절벽이 깍아지른 곳은 바로 그윽하게 숨어사는 은자隱者들의 거처다. 그러므로 몸에 화려한 관복官服을 걸친 자들의 자취는 깊은 산림에까지 미치지 아니하며, 돌과 샘물같은 자연에 정을 둔 사람들은 꿈에도 궁궐의 고대광실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성품이 고요한 이와 번잡함을 좋아하는 이가 서로 길이 다른 까닭에 자연스런 이치로서 그리 된 것이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하는 일이 많은데 어째서 그 꿈이 산림에까지 이르렀던가? 또 갔더라도 어떻게 도원까지 다다른 것인가? 또 나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에서 놀며 이 몇몇 사람들과만 함께 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 성격이 고요하고 외진 곳을 좋아하며 평소에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 있으며, 그 몇 사람과 특히 두텁게 사귀었던 까닭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가도可度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본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4. 미완의 비장미 - 윤두서의 <자화상>

 

 

 

 

윤두서의 삶을 관통해온 정신은 그의 호號 공재恭齋의 뜻 속에 담겨 있다.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의 말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군자가 공恭을 도탑게 하면 천하가 편온하게 된다(君子篤恭而天下平)"고. "그러므로 이른바 공이란 것은 바로 군자가 시작과 마침을 이루고, 위와 아래에 두루 통하는 도인 것이다(然則所謂恭子 乃君子成始成終 徹上徹下之道也)." 즉 공恭이란 바로 '군자의 길'이고 공재恭齋는 '군자의 길을 닦는 공부방'이라는 뜻이다.

 

윤두서는 국문학사상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로서 해남海南 고산고택孤山古宅을 이어가던 윤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일설에 의하면 다산의 실학實學은 그 연원이 외할아버지 윤두서를 거쳐서 그 증조부인 윤선도의 박학다문博學多聞 경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한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그의 학문이 얼마나 폭 넓은 것이었던가는 유명한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윤두서를 그리워하며 "이제 공께서 돌아가시니 친구를 사귀는 일이 외롭게 되었고, 그를 좇아 미처 듣지 못했던 새 지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公沒而友道孤也 無終而聞所未聞矣)"고 한탄한 글에서 실감할 수 있다. 이하 윤덕희가 쓴 윤두서 [행장]에서 그의 삶과 인간됨을 간추려 본다.

 

공재 윤두서 공公은 15세에 결혼하였는데 키가 훤칠하고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다......노복을 부릴 적에 위엄으로 하지 않거 덕스런 얼굴로 대하니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정축년(1697년, 서른 살)에 친아버지를 뵙기 위해서 남쪽 고향(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양어머니께서 시골 장원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고 명하셨다. 공께서 남으로 내려와서 부채 기록을 보니 그 액수가 퍽 많아서 그저 수천 냥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 빚을 진 사람들은 궁핍한 이가 많아서 도저히 갗을 길이 없었다. 공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버렸다......

 

학문에 있어서는 경전은 물론이고 군사 관계까지 미쳐서 세상에 전하는 병법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셨으며......일찍이 [정의]라는 글 한 편을 지어 장수의 도리를 갖추어 농하기도 하셨다......그림 그리는 일은 공께서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셨지만 때때로 글 짓고 쓰는 틈틈이 뜻 닿는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셨다. 다만 사물의 닮은 점만 위주로 하지 않았으므로 정신과 뜻의 나나탐이 완연히 살아 움직이며 드넓고 고상한 운치가 있었다. 오래 공부한 저력이 아니고는 이르지 못할 점이었다......혹 남이 다 아는 선대로부터 혐의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정말 그 사람 자신이 사귈 만하면 툭 터 놓고 한계를 넘어 매우 친하고 격의 없게 지냈다......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받은 재산이 자못 풍족하여 사람들은 벼슬만 없지 제후가 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일찍이 조금도 손대어 불리려 하지 않은 데다가 자식과 조카들이 점점 많아져서 쓰임새가 넓어지게 되었다. 또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남의 급하고 곤궁한 사정을 두루 돌보았는데 마치 필요한 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