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좋은 글귀 2012. 5. 31. 16:41 Posted by 따시쿵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일 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지 못하였지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함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부터 연관된 시들을 같이 올려본다.

머리를 깨치는 방법은 많은 말과 화려한 수식어가 있는 문장보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몇줄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바로 이 시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 책의 무일(無逸)편에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다' 라는 문맥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아니 가장 가까운 부인이나 남편,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는지 자문자답을  해 보면 심히 부끄럽다. 나에게 묻는 질문치고는 답변이 궁색하다. 


'삶이란 나 아닌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 되는 것' 깊이 맘속에 간직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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