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李光洙, 일본식 이름: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1892.3.4~1950.10.25] 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대 문학 초창기에 '문단 2인시대'를 개척했던 선구적인 소설가이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응 요의고 고학을 하여 동학에 심취하며 자랐다. 일본 경찰의 동학 탄압으로 서울로 올라온 그는 1905년 <일진회>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대성중학에 다니다 학비가 모자라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현해탄을 넘어 명치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였다.

일찍이 재능을 나타낸 이광수는 문일평등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한일합방나던 해에 잠시 귀국하여 오산하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 그는 상해를 유랑하며 뜻을 키우다 대지주 김성주의 도음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문학과 철학을 배웠다.

1917년 이광수는 장년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한국 근대 문학에 새로운 기틀을 세웠으며 잇따라 단편 <소년의 비애>, <개척자>를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근대 문학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언문일치의 현대적인 문장으로 민족 개화를 위한 계몽소설 집필에 몰두하였다.

1917년에 폐질환으로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하면서도 조선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습관을 비판하는 <신생활론>과 <자녀 중심론>을 발표하였으며 1919년 동경유학생이 중심이 된 <2.8독립 선언문>을 기조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1919년 <창조> 동인이 된 이광수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봉건적인 생활관습을 비판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는 한편 <단종애사>,<흙> 등 중요한 장편을 썼다. 1926년 장편<마의 태자>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한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37년에 도산 안창호가 주축이 된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수간된 이후부터 이광수의 사상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여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면서 친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향산광랑(香山光郞 )> 이라고 창씨개명한 후 친일 변절자로 돌아선 이광수는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글을 여러 편 발표하였는데 그의 이런한 친일 행각은 아직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해방이 되자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불교에 심취해 지내다 6.25때 납북되었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근대적인 언문일치의 문장을 시도하였다는 점과 민족개조론에 입각하여 근대화를 향한 계몽적인 소설을 많이 썼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의 경험을 소설로 옮긴 얘기다.

교도소 병감(病監)안에서 주인공, '민가', '정가', '윤가', '강가' 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인칭 시점에서 기술을 했다. 교도소 안이라는 극히 폐쇄적인 공간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나약함, 재판에 대한 두려움, 긴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죄수들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보여 주면서 이야기 진행된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여기 나오는 사람은 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등장을 하면서 요즘 인기리에 방영하는 1박 2일의 복불복 유행어....<나만 아니면 되> 라는 대화와 행동을 한다.

         "그래, 물을 한방울도 안 남기고 자신단 말이오? 내가 아까 물이 있는 걸 보고 잤는데...........그렇게 남의 생각을
          아니하고 욕심만 채우니까 두루 밤낮 똥질만 하지."

          하고  트집을 잡는다.

         "뉘가 할 소리야? 그게 춘치자명이라는 것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