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현 / 그 청년 바보의사

오늘의 책 2013. 11. 23. 10:02 Posted by 따시쿵

안수현

 

1972년 1월17일에 태어났다. 1991년 고려대 의학과에 입학하여 고려대 의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의학과(석사 수료, 박사 과정)를 졸업했다. 이후 내과 전문의로 일하며, '예흔' 리더, 한국누가회(CMF), 영락교회 청년 3부 / 의료선교부, 28사단 사단의무대 군의관. 프리랜서 praise&worship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단정하게 깍은 머리에 105사이즈의 흰색 폴로셔츠, 푸른색 바지를 즐겨 입던 178cm의 듬직한 체구였던 청년의사는 환자들에게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다. 그는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며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참 의사'였다. 환자들에게는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으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청년 의사. 의대생 시절부터 ‘스티그마’라는 아이디로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썼으며, 해박한 지식과 올곧은 신앙의 자세가 드러난 글들은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4년에는 <청년의사> 주최 ‘한미수필문학상’ 공모에서 “개입”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2003년 28사단 사단의무대 군의관으로 입대한 청년의사는 2006년 1월 5일, 예수님의 흔적을 좇아 달려가던 서른 셋의 나이에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고집으로 《그 청년 바보의사》와 《그 청년 바보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이 있다.

 

 

 

토저 마이티 / 이것이 성공이다

오늘의 책 2013. 10. 28. 08:08 Posted by 따시쿵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목사이자 저술가였다. 18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버그에서 태어났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1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 교회에서 44년간 목회를 했고, 그 중 31년을 시카고의 '남부 동맹 교회'에서 시무했다.


경건시와 신비주의적인 찬송, 에머슨과 셰익스피어의 글을 좋아한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풍성하고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절충하여 타협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이나 십자가 없는 성공 처세술을 전하는 것은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나님을 추구함』,『경건 생활의 기초』,『패배를 통한 승리』,『하나님을 바로 알자』『거듭난 자의 생활』,『경건 생활의 기초』,『경건 생활의 비결』,『예수 방향으로 가라』등이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을 하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는 '이 시대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제약을 지니게 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이 시대정신에 물들지 않을 수 없다. 탐욕에 기반을 둔 무한경쟁의 살벌한 정글 법칙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세뇌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야망 실현을 '비전'의 미명으로 정당화하고 기도응답으로 호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의 출세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추구한다는 출세 방식 사이에 과연 다른 점이 있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양이 이리를 벤치마킹하여, 자신의 발톱을 날카롭게 기르고 송곳니를 부지런히 숫돌에 갈아 드라큘라의 이빨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기형(奇形) 양이 되면 이리를 이길 수 있는가? 오히려 달아나는 데 지장을 초래하여 더 빨리 잡아먹히고 만다. 양으로 부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리)의 성공법칙으로 무장하는 것이 바로 이 기형의 웃기는 양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하나님은 이리의 방식이 아니라 양의 방식으로 평천하(平天下)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니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食物)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聖山)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5:25).

 

토저는 이 책에서 바로 양의 이러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성공 방식에 대해 천명하고 있다. 이 시대의 선지자 토저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찬 메시지를 들어보라!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

 

 

 

예수님을 알기 위해 지불할 대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름답고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는 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땨문에 그들은 그렇고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악한 것들을 삼가는 것으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다. 더러운 것, 해로운 것, 추잡한 것을 삼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음란하고 죄악된 것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소극적으로 어떤 것들을 섬기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끝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유감그럽게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나쁜 것들'뿐만 아니라 '좋은 것들'도 버렸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라고 말했다. 본래 그의 권리에 속하는 것, 그에게 유익이 되는 것, "누가 뭐래도 이것은 내 것이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내가 이것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는 기꺼이 포기했다. 바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말이다.

 

"나는 내게 좋은 것들까지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지혜와 아름다움과 진리와 영생의 근원이요 샘이시다. 그분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버리지 못하고 집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평안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적 평안을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늘 고난에 노출되었으며, 심지어는 3주 동안 밤낮 풍랑에 밀려 바다를 떠돌기도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어떤 것에도, 심지어 우리의 목숨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에 집착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보화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즐거운 삶에 악세서리처럼 첨가되어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매력에 무한히 빠져들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바울은 지금으로 말하면 박사 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많은 학식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고백을 들어보자!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똑똑히 기억하라. 왕족이든 사대부 집안이든 모든 혈통은 부패했다는 것을! 나는 귀족 출신이든 빈민굴 출신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 지식, 외모, 능력을 자랑하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성공'과 '출세'라고 생각한다. 정신 차리라.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고작해야 현대의 기독교는 "도박을 하지 마라. 안 그러면 패가망신할 것이다. 술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노숙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나는 이런저런 저질스러운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나는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그런 것들을 끊을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양심적 유대인으로 살아온 그가 그런 것들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 술을 끊었습니다."라고 간증하는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귀한 간증이요, 선한 일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기본적인 것에 머물면서 "나는 이런저런 것을 하지 않는다"라고 자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처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폿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라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홀로 거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건강과 생명까지 주님께 드려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건강을 주님께 바쳤다. 내가 나의 사명을 다 완수했다면, 내가 굳이 이 헛된 세상에 더 머물 이유가 무어이겠는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어찌하여 늦가을의 마지막 잎새처럼 처량하게 매달려 있어야 하겠는가?

 

당신의 건강을 주님께 드려라. 그리고 당신의 생명마저도 드려라. 사람들은 주님께 그들의 생명을 드리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아는 한 목회자가 있는데, 의사가 그에게 "당신에게 협심증이 생겼습니다. 잘 관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훌쩍이더니 캘리포니아로 가서 은퇴하였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목회자가 있는데, 그 역시 협심증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괜찮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말한 후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의 아내가 일어나 그를 깨우려고 했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떠난 자리에는 미남(美男)이며 키가 큰 그의 육신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호흡까지 주님께 드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는 말대로 살다가 죽었다.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았다. 그는 "죽기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은 의연(毅然)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라.

 

당신의 날이 얼마나 길어질이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을 주셨다. 첫 째는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6 하)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하)라는 말씀이 있다.나는 이 두 말씀에 의지하여 이제까지 살아왔다.

 

 

순교를 자청한 그리스도인

 

나의 이런 교훈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런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사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저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가는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 가려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주님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지 말라. 주님은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을 때 그분은 그것을 다시 돌려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좋은 예가 스탬 선교사 부부의 경우이다. 존 스탬(John Stam)과 베티 스탬(Betty Stam)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은 나 부부를 야외로 끌고 나가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선교 행위를 당장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소."

"그래? 그러면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어라."

스탬 부부는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었고, 날카로운 칼이 그들의 목을 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마이더스(Midas)와 세상의 모든 왕들과 모든 구두쇠들보다 더 부유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도인들이 박해당하여 죽었던 로마 시대의 일이다. 한 성도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고 싶은 열망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주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입니다. 나는 주님께 내 목숨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면류관들 위에 이 '순교의 면류관'을 올려놓고 싶습니다. 나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개입한다면 나는 순교를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제발 개입하지 말아주십시오. 권세자를 찾아가서 선처를 호소하지 마십시오. 나는 늙은 사람이며,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내가 이 '순교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이 성도의 친구들은 개입하지 않았고, 로마 당국은 사형을 집행했다. 감사하게도, 결국 이 신앙의 위인은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영적 거인(巨人)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위대한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주(主)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나의 나라는 사라지고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간절한 소원이 그 비결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가 먼저 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내 마음속의 보좌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세 가지 준칙

 

인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인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완고한 세대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 그들은 장차 도래할 세상의 멸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헌 사람들은 조언(助言)을 원할 것이고, 나는 바로 그 조언을 해주고 싶다. 완전한 사람의 조언은 아니다. 다만 이런 사람들을 돕겠다는 일념(一念)을 가진 사람의 조언이요, 오랜 세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의 조언이다.

 

당신은 이 완고한 세대에서 구출 받기를 원하는가?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이 허망한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의 삶을 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를 행하라.

 

첫째,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말하라.

둘째, 육신을 억제하라.

셋째, 단순하게 살아라.

 

이것은 다음 성경 구정들의 교훈이기도 하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廣大)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라.....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5, 22)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3)

 

 

내게 송곳을 주신 하나님

 

몇 년 전 하나님은 내게 날카로운 송곳을 주시면서 "아들아, 교만하게 부풀어 오른 네 자아(自我)에 구멍을 내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송곳으로 내 자아를 찔렀으며, 바람이 '쉿' 소리를 내며 내 자아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불평의 소리가 들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과대 포장되어 부풀어 올랐던 내가 본래의 나 자신으로 작아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과대 포장된 자아를 훌훌 벗어버리는 것이 즐거웠다.

 

젊었을 때 나는 총 쏘기를 아주 즐겼다. 22구경 회전식 연발 권총을 즐겨 사용했다. 한가한 시간에 재미 삼아 친구와 함께 야외로 나가 표적을 만들어놓고 총을 쏘았다. 우리는 그 표적을 '진흙 닭'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진흙을 닭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가 그것에 깃털들을 많이 꽂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우리가 깃털을 꼿꼿이 세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로는 얼마나 작은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과대 포장되어 있는가!

 

명심하라. 허세적(虛勢的)인 깃털들을 다 뽑아버리고 본래의 크기로 작아지지 않는 한 결코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신 자신을 부인하라.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어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이 당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믿어라. 그리고 이 믿음대로 살라.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원한과 분노가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화를 잘 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노라고 자랑한다. 그들은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이며 완전히 속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죽일 것이며,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도 기쁨도 열매도 유익도 승리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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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 산상수훈

오늘의 책 2013. 10. 28. 08:04 Posted by 따시쿵

John Robert Walmsley Stott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요 저술가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로 30여 년 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을 입안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을 적극 주도해 왔다. 런던 현대 기독교 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쳐 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광범위한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설립한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펴 나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라 칭했고, 전기 작가 존 폴락은 "사실상 전세계 복음주의의 신학적 리더"라고 했다. 2005년 "타임(Time)"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한바 있다.


구십 평생 제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2011년 7월 27일 오후 3시 15분 런던 바나바 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다.






역사 e: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오늘의 책 2013. 10. 5. 12:08 Posted by 따시쿵

저 : EBS 역사채널ⓔ


EBS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기획한 프로그램으로 5분 분량의 강렬한 메시지와 세련된 영상을 통해 한국사의 주요 사건이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에 기획편성되어 일주일에 한 편씩 방영되며, 영상과 메시지를 통해 우리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학부모, 교사, 청소년 등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어떤 젊음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급하게 몰아가는데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 할 것인가."

 

 

어느 양반가의 망명길

 

1910년 12월 30일 밤, 한 무리가 어둠을 뚫고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젖먹이부터 60대까지 섞인 기다란 행렬은 국경을 지키는 일본 감시병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향했다. 한 해가 막 저무는 야밤, 이들이 북풍이 몰아치는 살벌한 국경선을 넘어야 했던 사정은 무엇일까?

 

이들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집안일을 돕던 식솔들로 그 수가 무려 60여 명에 이르렀다. 이유승의 여섯 아들은 서울 장안에서 우애 좋기로 유명했다. 첫째 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 넷째 회영, 다섯째 시영, 여섯째 호영, 이들이 12월 어느 날 함게 모인 자리에서 넷째 회영은 형제들에게 호소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나라가 망하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형제들은 우당 이회영의 말에 따라서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정한다. 여섯 형제의 뜨거운 결의는 향후 30여년간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됐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우당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경술국치가 잇던 1910년 당시,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다.

 

 

무장독립투쟁의 씨앗,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우당은 여섯 형제 가운데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호방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의 현실은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었다. 30대부터 항일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농장을 경영했던 우당은 40대 중반에 들어선 1905년 가을,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으로 한국의 외교원을 금지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항의했다. 젊은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함께 해 온 이상설, 동생 이시영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대한제국은 109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2년 뒤에는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더이상 활동을 펼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우당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찾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이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우당은 나라 밖 상황에 주목했다. 우선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해 국원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고종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특사로 추천했다.

 


 

100년 만의 귀환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

 

1592년 임진왜란

함경도 일대에서 벌어진 최대 육상전

북관대첩

 

단 한 번도 진 저기 없는

'전쟁의 신' 가토 기오마사 부대

2만 2천여 명

VS.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

200명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패퇴한 왜군

 

1905년 러일전쟁

북진하던 일본군은

함경북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

 

비석은 강제로 떼어져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무거운 머릿돌로 눌린 후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된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드라마 같은 이야기

 

400년 전 온 나라가 전쟁으로 파탄에 빠졌을 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용감한 이들이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잊었다. 100여 년 뒤인 1707년 그들의 이야기를 한 후손이 돌에 새겼다. 그 뒤 돌에 새긴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역사에 묻혔다. 세월이 지난 후 역사에 묻혀 있던 돌은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파란만장의 돌은 우여곡절 많았던 사나이들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바로 북관대첩비의 이야기다. 북관대첩비의 정식 이름은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

 

북관대첩비는 말 그대로 북관(北關)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북관은 오늘날의 함경도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크게 무찌른 일을 기념해 숙종 35년(1709년)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이다. 높이 187센티미터, 너비 66센티미터, 두께 13센티미터의 비석에는 150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병장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비석을 세운 이는 정육품인 함경도 북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로 부임한 최창대였다.

 

북관대첩비의 운명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편으 드라마처럼 기구하다. 왜 비석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세워질 수 있었을까?

 

1592년 4월 중순,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논란 선조는 4월 30일 피난에 나섰고 한양은 5월 2일, 2개월 만인 6월 14일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되었다. 날이 더워질수록 일본 군사들의 사기는 올라가는 듯했다.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스물여덟 살의 정문부는 북평사라는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민의에 부응해 그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함경도의 의병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남쪽의 왜군과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북쪽의 여진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정문부를 비롯한 북관의 의병들은 1592년 9월부터 반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의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겨준 역적들을 소탕했고, 경성, 임명, 단천, 백탑교에서 여덟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해 함경도에서 몰아냈다. 하급 무관이 이끈 200여 명 의병부대가 명장 지휘하의 2만 명 정예부대를 크게 깨부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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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칼의 노래

오늘의 책 2013. 10. 4. 13:43 Posted by 따시쿵

김훈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기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 없는 수영을 밝고 지나갔다. 그래 가을에 해남, 강진,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경상 해안 쪽 추수는 적들이 몰아갔다. 적들은 여수, 순천 너머에 포진했고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들은 연안 육지의 성 안에 군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직 적의 군량을 빼앗기 위한 전투를 궁리해 보았으나 적의 육지 요새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없었고 수군을 육지로 돌려서 육로를 따라 적의 내륙 쪽 후방을 찌를 수도 없었다.

 

싸워서 먹을 수도 없었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군대가 백성들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진도가 그나마 온전하여 가을에 8백 석을 보내왔다. 완도는 성 안에 농토가 좁았고 백성들은 일찍부터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 적이 닿지 않아서 완도는 온전했으나 군량은 콩 3백 석에 그쳤다. 완도에서 온 콩으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갔다. 수영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관아들은 3백 석, 4백 석씩을 보내왔거니 가을이 다 가도록 아예 기별이 없었다. 종사관을 보내 다그치면 고을 수령들은 빈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바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네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으 끝장이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네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 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

 

 


 

노을과 화약 연기

 
지금, 아무 일도 없는 바다 앞에서 임진년의 기억들은 멀고 흐리다. 바다는 기억을 지운다. 때때로 야경 수졸들의 호각 소리에 놀라 께어나는 새벽에 밑도 끝도 업이, 내가 죽인 아베 준이치의 눈동자와 아베가 죽인 면의 젖냄새와  적에게 끌어가 죽은 여진의 젓국 냄새, 그리고 또 내가 시켜서 목 베어 죽인 내 부하들의 잘린 머리의 뜬 눈이 떠올을 때, 지난간 전투의 기억은 계통 없이 되살아났다.

 

임진년 4월에, 경상 좌수영은 교전하지 않았다. 경상 해안은 비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3천이 빈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달려들었고, 그해에 30만이 바다를 넘어왔다. 조짐은 오래 전부터 감지되어왔다.  조정은 믿기 두려운 일을 믿지 않았다. 경상 연안포구들은 무인지경이었다. 적들은 편안히 포진했다. 봄농사를 시작한 연안 백성들은 마을을 버리고 먼 섬이나 골짜기로 달아났다.

 

 


 

비린 안개의 추억

 

봄에는 바다의 아침 안개가 일찍 삭았다. 물 위에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바람이 몰아가지 않아도, 멀리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띠처럼 흘러서 먼바다로 몰려갔다. 해가 수평선을 딛고 물 위로 올라서면,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새벽 순찰 길에 걷히는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나가면 봄바다의 비린내는 온몸에 감겼다. 나는 차고 비린 새벽 안개를 몸속 깊이 들이마셨다. 안개의 입자들이 허파 속으로 스몄다. 그 비린내는 새로운 시간의 비린내였다. 새로운 시간은 먼바다로부터 새뱍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듯했다.

 

새벽 순찰 길의 바다 안개는, 보이지 않는 바다 저편의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새로운 싸움을 예비하는 새로운 시간이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스몄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낯선 태초의 바다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은 싸움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맑은 시간이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그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바탕이었다. 새벽 바다에서 낯설고 맑은 시간들은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시간들을 다 건너가고 나서야 나의 전쟁은 끝날 것이었고 그때 비로소 나의 생사, 존망은 하나로 합쳐져 평안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시간의 파도는 끝도 없이 밀어닥쳤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1749년 8월, 황실 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5년에 법률학을 배우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처음으로 자유롭게 레싱, 빙켈만 등을 읽었다. 그러나 1768년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했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 대학에 입학하여 다시 법률 공부를 하는 동시에 의학 강의도 들었다. 이때 헤르더와 교제하면서 호메로스, 성서, 오시안, 민요, 셰익스피어 등을 알게 되는데, 이로써 '슈투름 운트 드랑', 즉 질풍노도 문학 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법률 학위를 받은 괴테는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문학에도 열성을 다하여 『괴츠 폰 베를리힝엔』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 희곡은 출간되자 대중과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고, 괴테는 독일의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1772년 괴테는 베츨라의 고등 법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괴테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를 독일의 작가에서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서게 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베츨라에서 괴테는 약혼자가... 1749년 8월, 황실 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5년에 법률학을 배우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처음으로 자유롭게 레싱, 빙켈만 등을 읽었다. 그러나 1768년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했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 대학에 입학하여 다시 법률 공부를 하는 동시에 의학 강의도 들었다. 이때 헤르더와 교제하면서 호메로스, 성서, 오시안, 민요, 셰익스피어 등을 알게 되는데, 이로써 '슈투름 운트 드랑', 즉 질풍노도 문학 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법률 학위를 받은 괴테는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문학에도 열성을 다하여 『괴츠 폰 베를리힝엔』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 희곡은 출간되자 대중과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고, 괴테는 독일의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1772년 괴테는 베츨라의 고등 법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괴테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를 독일의 작가에서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서게 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베츨라에서 괴테는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연모했는데, 이 체험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거의 사실 그대로 담겨 있다. 부프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괴테는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3년간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적 결실을 거두었다. 바로 기존의 무미건조한 형식미에서 탈피하여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할 것과 인습적에 것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한 슈투름 운트 드랑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 절정을 이룬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1775년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를 방문하여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괴테는 슈투름 운트 드랑의 시기를 마감하고 추밀참사관에 임명되어 행정적인 활동을 했다. 다망한 정무 생활 틈에서도 지리학, 식물학, 광물학 등 자연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나 창작 면에서는 침체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1786년(37세)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다시 예술의 세계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2년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에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788년 바이마르로 돌아온 괴테는 정무에서 떠나 고독 속으로 숨었다. 이때 나중에 정식 부인이 된, 평민 출신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실러와도 처음으로 만났다. 1794년부터 실러와 깊은 친교를 나누기 시작한 괴테는 실러가 발행하던 문학 잡지인 『호렌』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05년부터 1815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 동안 나폴레옹을 세 번이나 만난 한편, 독일 문학 최초의 사회 소설로 평가받는 『친화력』를 완성했고, 자서전의 백미로 꼽히는 『시와 진실』 1∼3부도 완성했으며, 『서동시집』 집필에도 착수했다. 1821년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완성했으며, 죽기 1년 전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했으며 1832년 바이마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5월 12일

 

이곳에 사람을 홀리는 정령이 떠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가슴속에 풍부한 상상력이 깃들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낙원처럼 느껴지네.

 

거리를 벗어나면 샘이 하나 있네. 나는 마치 메루지네와 그 자매들처럼 그 샘이 지닌 마술의 힘에 이끌려 그 곁을 떠나지 못한다네. 조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면 아치형의 문 앞에 이르는데, 거기서 다시 스무 계단쯤 아래로 내려가면 그 밑에 샘이 있네. 말할 수 없이 맑고 차가운 물이 대리석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지. 샘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나무들, 그리고 그곳에 감도는 시원한 분위기, 이 모든 것에 왠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도록 만드는 그 어떤 분위기가 있단 말일세.

 

나는 날마다 그곳에 앉아서 1시간쯤 시간을 보내네. 그러고 있노라면 시내에 처녀들이 물을 길으러 오네. 물을 긷는 일은 소박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야. 옛날에는 공주님까지도 손수 물을 길었다고 하네. 그곳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노라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샘물가에서 만나 서로 사귀고 결혼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원히 떠오른다네. 그리고 샘물가에 떠돌고 있는 자비로운 정령들이 느껴지네.

 

아아,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무더운 여름 날 힘든 여행을 마치고 마시는 시원한 우물의 상쾌한 기분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임이 틀림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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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자전거 여행2

오늘의 책 2013. 2. 16. 11:56 Posted by 따시쿵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조강에서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 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겨우 이해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들여다보면서 공자는 말했다.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저러하다'니, 어떠하다는 말인가. "저러하구나"라는 말은 '흘러가는구나'라는 말처럼, 나에게 들렸다. 그래서 공자의 말은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은 하나마나한 말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공자의 그 말을 읽을 때마다 언어를 버리거나 언어를 넘어서려는 성인의 조바심을 느꼈다. 흐르는 물가에서, 성인은 언어와 자연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당도한 것이다.

 

그 경계에서, 공자는 자연을 상대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기보다는 언어를 풀어서 놓아주고 곧바로 자연 쪽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는 끝끝내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공자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다시 인간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 부자유한 한계 안에서 공자는 아름답다. 시선을 거두어 안쪽으로 향한 공자가 "저러하구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연쪽으로 넘어가려는 자의 말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의 독백처럼 들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라고, 김소월이 그 단순성의  절창으로 노래할 때도, 그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에게는 들린다. 아마도 그것이 모든 서경시(敍景詩)의 운명일 것이다.

 


빛의 무한공간

김포평야

 

 

조선화가 겸재(謙齋, 1676 ~ 1759)는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강변 경관을 즐겨 그렸다. 겸재의 한강 화폭들은 강을 상류에서부터 그려내려오다가 행주산성 건너편인,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128미터) 위에서 끝난다. 개화산은 겸재의 최하류 관측소이다.

 

개화산 꼭대기는 강이 스러지는 하구에 폎쳐지는 공간의 무한감을 보여준다. 겸재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개화산 위에서 바라보는 한강 하구는 아득하게 넓어서 눈 둘 곳 없다. 겸재의 화폭 위쪽에서, 흐려진 조강은 멀리 김포반도 북단을 돌아서 서해로 나아가고 낮게 엎드린 산들은 산의 잔영으로 멀어진다.

 

조선의 화가들은 이 하구의 먼 산들을 잔산(殘山)이라고 불렀다. 잔산은 공간을 분할하지 않는다. 잔산은 공간 속으로 풀어져서 오히려 공간의 무한감을 완성시켜준다. 그 넓은 공간에 여린 빛들이 가득해서 겸재의 화폭이 보여주는 한강 하구와 김포 들판은 늘 새롭게 빛나는 무한강산이다.

 


10만 년 된 수평과 30년 된 수직 사이에서

고양 일산 신도시

 

내가 사는 마을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 신도시 지역이다. 경의선 철도의 왼쪽 평야지대로 그 서남쪽은 한강 하류에 닿아 강 건너로 김포평야를 마주 대한다. 1990년에 일산 신도시 개발사업이 시작될 때 이 지역은 찰지고 향기롭기로 유명한 일산미(一山米)가 생산되던 논이었다. 이 평야와 인접된 고양의 낮은 언덕에서는 10만 년전의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일산의 10만 년 역사는 1990년을 고비로 천지가 개벽하듯 바뀌어 논바닥은 신도시가 되었다.

 

일산 신도시는 수평의 삶을 수직의 삶으로 바꾸어놓은 마을이다. 자전거를 타고 자유로 언저리의 논길을 따라 교하, 출판문화단지, 오두산전망대를 거쳐 곡릉천 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10만 년 된 수평과 30년 된 수직 사이를 기웃거린다.

 

우리 마을에서는 해발 고도 83미터의 정발산이 가장 높은 산이다. 나머지 지역은 모두 해발 15미터 정도의 밋밋한 언덕들이 한강 쪽을 향해 흘러 내리고 그 사이에 작은 골짜기들이 이어져 있었다고 구일산 지역의 노인들은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은 모두 불도저에 밀려 나가서 언덕도 골짜기도 남아 있지 않다. 삶을 수직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그 땅을 수평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수직의 도시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 일산평야는 낮은 언덕과 골짜기들로 고저감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삶의 공간이 수직으로 바뀐 뒤 이 도시의 바닥은 이제 깎은 듯한 수평이다. 주거와 생활은 땅의 굴곡과 고저에 구체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직 구조물들을 받아내는 평면의 입지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10만 년 동안의 풍경이 30년 만에 바뀐 것이다.

 

정발산 꼭대기에서는 이 시가지의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강폭이 아득히 넓어진 하류의 한강이 느리게 흘러서 김포반도의 북단으로 돌아나가고 그 안쪽으로 수직의 건물군이 들어서 있다. 밤에는 러브호텔, 카바레, 안마시술소의 네온사인과 교회의 네온사인이 뒤섞여 불야성을 이룬다. 날이 저물면 사찰들의 용마루와 처마에도 네온사인이 켜진다.

 

30년 전의 논바닥을 갈아앞어서 세운 마을은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세속 도시다. 세속 도시의 교회들은 가정의 순결과 건강을 가장 중요한 현세적 덕목으로 가르친다. 일부일처제는 그 덕목의 풍속적 안전장치다.

 


 

박상진 /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오늘의 책 2013. 2. 3. 18:48 Posted by 따시쿵

박상진(朴相珍)


 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우리나라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는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 분석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7~2009년에 걸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천연기념물 분과)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무령왕릉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 우리나라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질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현재 우리숲에 우리나라 주요 수목에 대한 생태학적 특징 및 나무 이름의 유래, 수목도감,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등 나무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직접 기고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비롯하여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2007),『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2004),『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랜덤하우스중앙, 2004),『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를 비롯해 전문서인『목재조직과 식별』(향문사, 1987) 등 여러 저서를 펴냈다

 

 

 

 

역사의 격변을 묵묵히 지켜보다

헌법재판소 백송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안에는 11그루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사람 등살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공해 도시 서울에 수백 년에서 천 년 가까이 살아가는 늙은 나무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약해빠진 노(老) 생명체가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아직은 '희망의 땅'이라는 증거라서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 중 수도 서울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헌법재판소의 백송을 찾아가 보자.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에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계유정난'이란 이름의 쿠테타가 일어난다. 피바다가 돼버린 마을에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재를 가져다가 뿌렸다. 이루 '잿골'이 됐다가 지금의 재동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참극이 벌어졌던 재동의 한 편에는 핏빛에 어울리지 않은 깨끗한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한양에는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즈음, 누군가가 멀리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생장이 느린 백송도 조금씩 몸집을 키워가는 사이, 자람 터는 어느덧 영조 때 유명한 재상 조상경의 집이 돼 있었다. 그는 7번에 거쳐 판서를 지내면서 조선 후기 풍양조씨 세도정치릐 추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이후 백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는 조씨 일가와 함께 영광의 세월을 함께 했다.

 

 


 

새마을 운동도 피해간 신령스러운 숲

원주 성남리 성황림

 

중앙고속도로 신림IC를 나와 영월쪽으로 접어들었다가 곧 좌회전 후 잠시면 도로 옆 평지에 펼쳐진 숲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서낭신을 모신 대표적인 성황림(城隍林)이다. '대동여지도'에 신림(神林)이란 이름이 나올 만큼 오래된 숲이다. 멀리 치악산 국립공원의 남쪽 끝에 우뚝 솟아오른 남대봉에서 발원한 주포천이 숨가쁜 물길을 잠시 멈춘 편평한 땅,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삶의 터를 잡았다. 당연히 마을을 지켜주고 소원을 빌 공동의 성황당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서낭나무를 심고 주위에 숲을 만들어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낭나무 한 두 그루로 서낭당 가꾸기에 만족한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비교적 넓은 숲을 마련했다. 한 평의 농경지고 아쉽지만 이렇게 평지를 서낭숲으로 가꾼 데는 홍수 조절의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림'이란 이름 그대로 신이 사는 숲,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개화기의 혼란과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사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숲은 세월이 지나면서 위 서낭과 아래 서낭으로 나위어 졌고, 일찍이 학술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일제때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로 지정됐다. 1962년 우리 손으로 다시 천연기념물 92, 93호로 이름 바꿈을 했다.

 

 


 

조선 관리들의 희로애락

평창 옛 운교역 밤나무

 

밤나무골 º 밤나무고개 º 율동(栗洞) º 율목동(栗木洞) º 율전동(栗田洞) 등 밤나무가 들어간 지명은 의외로 흔하다. 밤나무는 열매와 목재 모두 쓰임이 많아, 1천여 종에 이르는 이 땅의 나무 중 우리와 가까이 지낸 나무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친숙하다. 6월에 회백색 꽃이 피었다가 가을밤 알밤을 거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거리의 군밤까지, 밤은 여러 번 변신을 한다.

 

밤나무는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천연기념물 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것은 최근 지정된 옛 운교역 밤나무뿐이다. 밤나무혹벌이라는 눈꼽 크기 남짓한 벌레의 피해를 받아 재래종 밤나무 고목이 거의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운교리 밤나무는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에서 방림, 평창으로 들어가는 42번 국도 옆 작은 음식점 뒤편 산비탈에 자라고 있다. 뿌리목 둘레가 6.4m나 되니 굵기는 지름 2m를 훌쩍 넘긴다. 1.5m 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있고, 갈라진 줄기도 지름이 1m가 넘는다. 나무 키는 14m이며 굵은 가지 여러 개가 얼기설기 뻗어 있다. 흔히 만나는 재배 밤나무와는 달리 엄청난 굵기가 놀라울 뿐이다. 고목으로서의 의젓한 품위와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돋보인다.

  


 

나라의 큰 일을 예언하다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영월읍내의 끝자락 언덕바지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주변에는 낮은 단층집이 몇 채 있고 멀리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을 이루는 합수(合水) 지점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 나무는 영월엄(嚴)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당나라 현종(712~756)때 파락사로 신라에 왔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고향 땅이 어수선해지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마치 배의 모양이므로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은행나무를 심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봉서 신범(辛汎, 1823~1879)이란 분이 있다. 규장각에 보관된 그의 시문집 '봉서유고(逢西遺稿)'에 실린 '월행(越行)'이란 기행문의 내용에는 그가 본관인 영월을 찾아 남긴 시 한 수가 있다. '발산은 평지에 멈추고/강 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구나/마을의 가운데는 천년된 은행나무가 자라고/예뿌터 엄씨들이 살고 있네.'

 

이를 통해 150여 년 전에도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었고 엄씨의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심은 은행나무를 엄씨들은 대대손손 보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14.8m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2003년 문화재청 일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이다.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이는 1,300년으로 양평 용문사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보다 2백년 앞선다.

 

 


 

쫒기던 임금도 쉬어가다

울진 실직국왕 굴참나무

 

고려 충숙왕 16년(1329) 정월, 임금은 황해도 평주의 천신산 아래 가옥(假屋)을 짓고 벌써 몇 달째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임금 노릇은 팽개치고 놀이에 열중한 것이다. 어느 날 지붕에서 물이 새자 사람들에게 "지붕을 덮는데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굴참나무 껍질이 가장 좋습니다."고 말했다. 곧장 백성들을 동원해 겨울나무 껍질을 벗기니 모두 고통스러워했다.

 

이처럼 옛부터 굴참나무의 가장 중요한 쓰임은 지붕을 이는데 있었다. 두께가 3~4cm 나 되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연이 준 방수물질이며 뛰어난 보온성을 가졌으니, 지붕 이는 데는 따라 갈 재료가 없다. 그래서 굴피집은 굴피나무가 아니라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든다.

 

굴참나무는 또 다른 쓰임이 있다. 다른 참나무처럼 흉년이 들면 풍년 때 보다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아,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울진의 굴참나무 한 그루를  찾아 본다.

 

동해안을 따라 길게 세로로 뻗은 7번 국도는 동해바다와 함께 달린다. 멀리 수평선에 걸쳐진 구름 한 조작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을 수 있다.

 

강릉과 포항의 가운데쯤이 울진읍이다. 읍을 벗어나 우회전하면 불영계곡 입구. 집 몇 채가 있는 삼거리의 마을 뒷산의 굵기가 네 아름에 이르는 굴참나무 한 그루가 동해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굴참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앞에 서서 훑어보면 정말 호호 할아버지 나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늙은 굴참나무다. 온통 충전물질로 채워둔 몸통과 울퉁불퉁 살아온 역사를 새겨놓은 껍질이 우선 그러하다. 약 3m 정도의 높이에서 굵은 가지 하나가 바다를 향해 거의 수평으로 길게 뻗은 모습도 힘에 겨워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것 같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보다 훨씬 늦지만 그래도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나무라고 다를 바 없다.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제는 기력이 쇠진해 있다. 그래도 앞에 서면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우리를 압도하는 위엄을 갖고 있다.

 

 


 

소나무 베어 팔아 마을을 지키다

예천 금당실 솔숲

 

살기 좋은 땅을 길지(吉地)라고 한다. 오늘날이야 자고 나면 값이 뛰는 땅이 길지이겠지만, 옛 사람들은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고 천재지변에도 안전한 곳을 최고의 길지로 생각했다. 경북 예천의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 마을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전국 열 곳에 이르는 살기 좋은 땅(十勝지之地) 중 한 곳이다. 선정기준을 따로 말하지 않았으니, 하고 많은 우리 금수강산에서 왜 이곳이 네번째의 좋은 땅으로 선택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기야 '십승지지'란 곳이 임진강 이북은 한 곳도 없고, 경상도가 다섯 곳이나 들어 있으니, [정감록] 저자가 자기가 아는 곳에서만 골라 넣은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복천, 용문사 계곡, 청룡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만나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살기 좋은 길지라고 했지만 물난리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단점을 가진 명당을 우리 선조들은 비보(裨補), 즉 모자람을 채워 넣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홍수가 마을로 들이 닥치는 것을 막아주고, 넓은 들판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곳이라 바람을 막아줄 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숲을 만들었다. 이런 목적의 숲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느티나무, 왕버들, 팽나무 등의 활엽수를 심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용문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겨울 바람이 문제였다.늦가을부터 불어대는 북서풍 칼바람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 안으로 사정없이 불어 닥쳤다. 그래서 깊이 뿌리를 박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으면서 무리지어 살기를 소나무가 제격이었다.

 

사실 이곳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무덤이 있을 만큼 오래된 마을이니, 아주 옛날부터 숲은 수호신처럼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을 터이다.그러나 구한말 나라가 어수선해지면서 수천 년을 지켜온 솔숲은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 1863년 동학의 접주 최제우가 체포돼 처형되는 혼란기에 민심이 흔들리면서 큰 나무들이 잘려 나가는 등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892년 7월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진다.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러시아인이 주인인 금광회사의 광부들 몰래 금을 캐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금을 캐는 것 자체보다 배 모양의 마을을 굳게 붙잡아 맬 닻의 역할을 할 오미봉을 파헤친 것에 더욱 격분했다. 마을의 양반들은 하인들을 시켜 광부들을 쫓아내려다가 사람이 몇 죽으면서 30여 명이 관청에 잡혀가고 만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하인들을 구출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숲의 소나무를 베어 충당했다. 그 결과, 숲이 온통 쑥대밭이 돼 버렸다.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은 1895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관직을 버리고 금당실로 내려온다. 그는 이곳에 95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솔숲 다시 가꾸기에 정성을 쏟는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사산송계(四山松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숲 가꾸기에 동참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리미가 의연하게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안동 진성이씨 종택 뚝향나무

 

안동에서 35번 도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청머리재란 고개다. 고개 넘어 중앙선 철로 밑을 지나 주유소가 있고 '진성이씨 종택' 입구라는 간판이 나온다. 거기에서 좌회전해서 5km 쯤 더 가면 진성이씨 종택(宗宅)이 있다.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이 두루 편안하다고 해, 지금은 두루 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의 동남쪽 아늑한 야산을 뒤로 두르고, 작은 개천을 앞에 놓고 펼쳐진 고색창연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모인 곳이 바로 진성이씨의 종가집이다. 대지 760평에 사당과 본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전통 기와 건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당으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경류정(慶流亭)'이 종택의 대표 건물이다. 성종 23년(1492)에 세웠으며 퇴계가 이름을 짓고 액자를 달았다고 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경류정의 바로 앞에는 마치 널직한 이불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뚝향나무 한 그루가 고가의 운치를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둑이나 우물가 등 주로 수분이 많은 곳에 흔히 심는 이 나무는 자람의 모양새가 보통 향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줄기가 비스듬하게 자라거나 여러 개의 줄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키도 크지 않거 가지도 비스듬히 뻗어, 전체 모양이 편평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 뚝향나무는 줄기가 땅에서부터 꽈배기 모양으로 꼬여서 올라가다가 1.3m 높이에서 기괴한 모양의 여러 가지가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사방으로 펼친 가지의 무게를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탓에 16개의 기둥을 세워서 나뭇가지를 받치고 있다. 나무의 키는 불과 3.2m, 가슴 둘레는 2.3m, 가지 펼침은 동서 14.7m, 남북 12.2m 정도이다. 특별히 향이 강해 제사 향으로 애용됐으며 주변에 벌레가 잘 모여들지 않는다고 한다.

 

 


변방에 살다간 자의 넋인 듯

울릉도 통구미 향나무

 

조선 정조 18년(1794)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은 월송만호 한창국을 시켜 울릉도를 조사한 내용을 조정에 보고한다.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정기 조사였다.

 

'4월 21일 배 4척과 80명의 병사를 싣고 출발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한 척을 잃어버리고, 23일경에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 지금의 태하리) 에 상륙했습니다. 산에 올라 살펴보니, 오른편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었습니다. 한 해 걸러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 지고 있었습니다. 24일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았습니다.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 속에 있는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 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해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가 온통 절벽이며, 자라는 나무로는 향나무, 잣나무, 황벽나무, 솔송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 아욱, 쑥, 모시풀, 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향나무 두 토막을 올려보냅니다.'라고 했다.

 

불과 1백여 년 전 구한말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이름 그대로 정말 '숲이 울창한(鬱) 언덕(陵) 섬'이었다. 울릉도 숲의 벌채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다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가 버렸다.

 

 


귀신은 썩 물러가라

창원 신방리 음나무

 

마산과 김해를 잇는 4차선 국도 14호선의 중간쯤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로 올라가는 1,015호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거기서 약 2km쯤 북으로 올라가면 왼편에 신방초등학교가 있고, 음나무는 학교 뒤 편 도로와 인접한 야산의 산비탈에 자란다. 음나무와 엄나무 양쪽을 다 쓰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음나무다. 엄나무란 가시가 날카롭게 달려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음나무는 원래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는 '벽사(辟邪)나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음나무 가지를 방 문 문설주나 대문 위에 걸어두고 잡귀를 쫒아내고자 했다. 험상궂게 가시가 듬성듬성 나 있는 음나무 가지를 귀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저승사자가 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고 다니듯이 잡귀도 도포를 입고 다닌다고 상상한듯 하다. 음나무 가시는 도포 입은 귀신이 신경 쓰이는 부분, 즉 도포자락을 걷어 올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 좋아할 이 없다. 귀신이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신이 싫어하는 나무에는 음나무를 비롯해 무환자나무, 복사나무 등이 있다. 반대로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에는 느티나무 등의 정자나무와 버드나무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자라는 4그루의 음나무 고목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키 15.4~9.1m, 가슴높이 둘레 3.2~3.7m의 범위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 15.6~13.2m, 남북 11.2~18.1 정도이며 서로 가지가 맞닿아 있다. 자람 터의 경사가 너무 급해 비가 올 때마다 흙이 흘러내려 붉은 황토가 드러난 상태로 있다. 최근 여러 가지 조치를 했지만, 큰 비가 오고나면 여전히 땅이 패일 정도로 척박하다. 그러나 나무는 잘 버티고 있다.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의 백성 사랑

하동 송림

 

남해 노량에서 출발한 황포돛대를 매단 장삿배는 섬진강을 따라 올라왔다. 풍부한 물산이 모여드는 하동장에서 한 몫을 단단히 잡고 다음날이면 '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화개장터'에서 80리 하동포구 장삿길을 마감했다.

 

당시로서야 고달픈 생활전선의 길고 긴 뱃길이었지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낭만과 꿈이 있는 물길이었다. 이 길의 한 가운데, 하동읍을 감아도는 섬진강가의 넓은 백사장을 따라 띠처럼 이어진 송림(松林)이 있다. 국내 최대의 이 토종 소나무숲은 조선 영조21년 당시 하동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처음 조성했다. 그는 민초들의 아픔을 아는 목민관이었다. 처음 부임한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섬진강의 모래톱과 푸른 강물이었다. 이곳을 다스려야 하동읍이 편안해지리라는 것을 아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막대한 품이 드는 흙과 돌 제방만이 물길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친화적인 제방을 만들자고 외쳤을 터이다. 이렇게 시작한 솔숲 만들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때 1천 5백 그루에 이르렀다. 지금도 50~300년생의 9백여 그루가 너비 30여m, 길이 2km에 이르는 푸른 띠를 만들고 있다.

 

송림은 멀리 광양만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을 막고, 홍수로 넘어오는 물을 막아자누느 다목적 숲이었다. 개개의 소나무는 소년나무와 노인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생태적인 안정성'이 뛰어나다. 또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듯 구부러지고, 비틀어지고, 때로는 서로 기대기까지 한 나무의 모습들은 전체적으로 평안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백사청송(白沙靑松)이란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아름다운 솔숲이 됐다.

 

 


 

 

김훈 / 자전거 여행

오늘의 책 2013. 2. 2. 11:53 Posted by 따시쿵

金薰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여수의 남쪽, 돌산도 해안선에 동백이 피었다. 산수유도 피고 매화도 피었다. 자전거는 길 위에서 겨울을 났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 지나오고 나도, 지난온 길들이 아직도 거기에 그렇게 뻗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길은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할 새로운 길이다. 겨우내 끌고 다니던 월동장구를 모두 다 버렸다. 방한복, 장갑, 털양말도 다 벗어버렸다. 몸이 가벼워지면 길은 더 멀어 보인다. 티셔츠 차림으로 꽃피는 남쪽 바다 해안선을 따라 달릴 때, 온몸의 숨구멍이 바람 속에서 열렸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서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았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작기 피어나고, 제작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돌산도 율림리 정미자 씨 집 마당에 매화가 피었다. 1월 중순에 눈 속에서 봉우리가 맺혔고, 이제 활짝 피었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도산서원과 안동 하회 마을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의 존영과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지금 천 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退溪)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경북 안동(安東)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그 오래되고 자존에 가득 찬 유림(儒林)의 고장은 두텁고도 다양한 문화의 층위를 축적해 왔는데,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유(儒)와 무(巫), 강(江)과 산(山), 학문과 생업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낸 하회(河回) 마을과 또 안동 김, 안동 권, 진성 이, 의성  김, 풍산 류, 예천 권, 풍양 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유림 영남학파 오랜 세거지들이 위엄과 자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퇴계는 그 절정이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부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이 오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퇴계는 70세에 이루어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 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낙동강 상류의 물가에 배움의 공간을  건설하려는 퇴계의 노력은 40대 이후 계속되었다. 퇴계는 46세 때 이 물가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고, 50세 때 한서암(寒栖庵)을 지었으며,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는 흐르는 물가에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身退安愚分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니 늙으막에 근심이 되는구나.

溪上始定居   시내 가에 비로소 살 곳을 정하니      
臨流日有省   강물에 임하여 날마다 성찰이 있으리

 

 

이 물가의 배움터에서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써서 한양의 임금에게 보내야 했다. 그의 연보는 한 해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임명과 불취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70세로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까지도 벼슬을 거두어주기를 요구하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보냈다. 그의 사직은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임금의 명을 거듭 물리치기 민만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주막에서조차 그는 사직서를 써서 인편에 보냈다.

 

사직서만이 이미 인의(仁義)를 저버린 정치 현실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초야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장연의 맹목적인 아음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도산서당의 그 염결하고도 단순한 구도는 퇴계의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를 집약하고 있고, 모든 아름다움을 인간과의 관계 위에서만 긍정한 그의 미의식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구조는 맞배지붕에 홀처마이다.

조용헌의 백가기행 百家紀行

오늘의 책 2012. 12. 29. 12:58 Posted by 따시쿵

집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집들은 공간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며, 집 그 자체가 인생철학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책 『조용헌의 백가기행』. 현대 우리 사회의 '집'이란 재산적 가치가 크다. 부동산 값의 상승과 하락에 사람들이 웃고 울고,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는 이 시점에 저자는 재산과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원래 집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집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인 ‘가내구원(家內救援)’을 집의 가치로 꼽으며 축령산 자락에 자리한 한 칸 오두막집에서부터 차는 풍류가 아니라 혁명이라 말하는 부산 달맞이고개의 다실 이기정까지,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의 눈으로 바라본 '집'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시대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위로와 휴식은 집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갖추어야 장치로 '다실'과 '정원', 그리고 '구들장'을 가내구원의 조건을 꼽는다. 이 세가지 조건의 의미를 21채의 집을 통해 설명하며 저자는 우리 시대 집의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고 열린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이끌고 있다.

 

조용헌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민속학을 전공하여 불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무 살 무렵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의 사찰과 고택을 답사하며 수많은 기인, 달사들과 교류를 가져왔다. 이들 재야 고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 지리, 인사에 관한 동양강호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해왔으며, 동양적 전통 이데올로기를 통해 서구적 가치관에 함몰되어가는 한국의 문화적 미와 전통을 복원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현재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다.

 

조용헌은 원광대 불교대학원 교수이자 사주명리학 연구가이다. 사주를 미신으로만 생각하던 통념에서 교수가 사주명리학을 연구한다는 것만으로도 혁신이었다. 대학시절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는 취미로 산 타는 것을 즐기다가 절을 다니게 되었고, 스님들과 가까워지며, 한의학, 풍수, 사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주를 맞추는 스님들에게서 신기함을 느꼈고, 그 호기심이 그를 사주명리학으로 이끌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사주명리학은 도교의 방사(方士=도사)들이 오래 살기 위해 자연의 흐름에 인간을 순응시키는 방법을 찾자는 수련체계였다. 밤과 낮이 음양으로, 사계절이 오행으로, 여름과 가을 사이 정 가운데에 자연의 중심이 되는 흙(토)을 넣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주 풍수 한의학 전문가를 찾아서 잡과라는 과거를 둘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었으나 점차 대중화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자리잡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사주명리학이 가진 상상력이 한국의 미래 문화콘텐츠 사업을 이끌어갈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 속에 가득 담긴 한국인들의 독특한 상상력이 바로 세계시장의 승부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주명리학과 풍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서구인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따라가는 현 세태를 비판한다. 서구인들이 무속이 아름답다고 하니, 무속연구를 하고, 탱화가 아름답다고 하니 탱화 연구를 하는 한 발 느린 미의 발견이 아닌, 현상 그대로의 미를 발견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찰기행 이나 잊혀져있던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을 통하여 미와 전통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책들은 20년이라는 그의 지난 세월, 그가 무수히 올랐던 산과 한국을 담고 있기에 더욱 공감이 된다. 또한 천문, 지리, 인사(人事)로 대표되는 삼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가득한 저자의 손길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고, 서구적인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 우리 조상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는 지금도 지난 18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고택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들을 만나며 천문, 지리, 인사에 관한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차는 풍류가 아닌 혁명이다

 

부산 달맞이 고개의 다실, 이기정 二旗亭

 

한국의 상류층은 너무 바쁘다. 저녁 시간에도 약속을 2~3개씩 잡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바쁘면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얕아지는 것이다. 얕아진다는 것은 결국 품질이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가 있는가? 나는 세 가지를 꼽는다. 집 안에 세 가지를 갖추고 싶다. 첫째는 다실 茶室이고, 둘째는 중정 中庭이요, 셋째는 구들장이다. 실내에다 정원 또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놓으면 중정이 된다. 중정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풍경을 관망할 수 있다. 바깥 경치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풍경을 본다는 것이 중정의 장점이다. 그 다음에는 구들장이다. 피로는 등 쪽의 신경과 근육이 굳는 것이다. 이 등쪽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장치가 바로 절절 끓는 구들장이다. 끓는 구들장에서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풀린다. 그 다음에는 다실이다. 다실은 왜 필요한가?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받기 위해서다. 집 밖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집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해 주는 장치가 다실이다. 21세기에는 과학적 진리에 의해서 종교적 신념이 해제된 시대다. 다실은 현대인이 집 안에서 신성 神聖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부산의 달맞이고개에 있는 이기정 二旗亭은 한국적인 다실의 한 예를 보여준다.

 

달맞이고개는 특이한 곳이다. 해운대 바로 옆이다. 도심에서 툭 터진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도심에서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이기정을 계획한 고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수가 없었다. 해볼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차 茶를 좋아했다. 다방을 해야겠다 싶어 부산 시내에 소화방 素化房이라는 다방을 차렸다. 다방은 물장사에 속한다. 물장사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하루에 수백 개의 찻잔을 수건으로 닦는 일이 주된 일과였다. 그 찻잔을 닦으면서 내면을 응시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 차에 몰두하게 되었고, 다법 茶法의 세계로 나아갔다. 다법은 차를 마시는 의례를 가리킨다. 다례 茶禮와 같은 말이다. 우리말에 '차례 지낸다'는 말은 남아 있지만, 그 차례는 중간에 실전 失傳되었다. 그런데 고명은 이 실전된 다례(차례)를 복구하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것이다. 우선 일본의 다례(차례)를 참고했다. 일본의 다례도 따지고 보면 백제에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중심부에서 없어진 것이 주변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다례가 바로 이러한 경우다. 고명은 일본의 다례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다법을 가다듬어 나갔다. 그 다법이 1백2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다법을 행하려면 대략 30분에서 1시간이 걸린다. 다법을 행하는 동안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다법을 행하다 보면 일단 그 동작들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딴생각을 하면 다법을 따라갈 수 없다.

 

 

풍류와 실용이 가득한 집

 

논산 명재고택 明齋古宅

 

명재고택의 숨은 그림은 석가산에 있다. 석가산 石假山은 인공으로 조성해 놓은 조그만 돌산을 가리킨다. 서양의 정원에는 없는, 하지만 동양의 조경 전통에서는 아주 중시했던 포인트가 석가산이다. 동양의 식자층들은 입산수도 入山修道를 하고 싶어했다. 몸은 세간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산을 그리워했다. 그렇지만 먹고사느라고 산에 갈 수 없으니까, 집 안에 산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정원에 있는 석사산을 보면서 등산 욕구를 대리 충족했다고나 할까. 명재고택 바깥 사랑채 마루 밑에는 검은색을 띤 높이 30cm 크기의 돌들이 땅에 박혀 있다. 어떻게 보면 수석 무더기를 박아 놓은 것 같다. 바로 금강산을 상징하는 석가산이다. 금강산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사랑채에 앉아서 마루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금강산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재고택 사랑채는 금강산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주인은 가정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위에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금강산 아래쪽 마당에도 돌무더기가 쭉 이어져 있다. 언뜻 보기에는 화단을 둘러싼 돌로 보인다. 이 돌들은 무산십비봉을 상징한다. 중국에 있는 산 이름으로 한자 문화권의 시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한 산이 무산십이봉 巫山十二峰 이다. 중국 양쯔강을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협곡이 나온다.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은 여기에 비하면 족탈불급 足脫不及이다.

 

 

보통 사람의 토종  정원

 

나주 죽설헌 竹雪軒

 

유현함의 그늘을 제공하는 좌탱자 우꽝꽝을 통과해 좌측으로 꺾으면 살림채인 단층 벽동집이 나온다. 서민이 대출받아 지은 단출한 집이다. 거실에 들어서면 마룻바닥이 질박하다. 폐교된 교실의 마룻바닥을 가져다가 사포로 다듬은 것이다. 마루 끝에는 검은색 벽난로가 실내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주고 있다. 거실 옆방은 한쪽 벽면이 온통 투명한 유리다. 유리 밖으로는 시퍼런 몸통을 지낸 왕대가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달력 그림처럼 보인다. 선비는 대나무를 보아야만 속기 俗氣를 턴다고 했던가! 대나무를 사철 잎사귀가 푸르고,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댓잎에서 흔들리는 소리가 빗소리 같기도 핟. 그리고 대숲에 들어가면 서늘한 느낌이 있다. 이 서늘한 느낌이 삶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인 과열을 내려주는 작용을 한다. 실제로 이 집은 나주와 광주 일대의 강호제현들이 수시로 모여서 시서화 詩書畫를 논하고, 문사철 文史哲을 이야기하며 노는 아카데미이자 살롱이다. 이렇게 서로 모여 놀아야만 중년에 직면하는 늙음과 병과 죽음의 근심을 다소나마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생과 걱정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대숲의 반대쪽으로는 노란 창포 밭이 널려 있다. 500평 가량 되는 노란 창포 밭은 5월이 한창이다. 5월의 밤에 이 창포 밭 앞에 서 있으면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반쯤은 알게 된다. 달밤에 비치는 달빛과 노란 창포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다.

 

 

소박하되 품격이 있는 선비의 집

 

진주 석가현 夕佳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