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M. 바운즈 / 기도의 심장

오늘의 책 2014. 3. 28. 11:09 Posted by 따시쿵

E. M. 바운즈 (Edward McKendree Bounds)


1835년 8월15일 미주리주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법정 일을 해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살이 되기 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24살 때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갑작스럽게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고,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첫 설교는 몬티첼로라는 인근 마을의 조그만 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1894년 내쉬빌에서 은퇴하기까지 감리교 목사로 사역하였다. 은퇴 후에는 집필, 순회부흥 사역에 힘쓰며 기도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 중 『기도의 능력』과 『부활』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간되었고, 다른 책들은 그가 죽고 난 후 바운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호머 핫지가 바운즈의 친구인 클로드 칠턴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이렇게 출간된 저서들은 1913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선지자'로 불리우는 이유이다.




위대한 믿음의 능력


기도의 원리와 절차 그리고 기도의 행위와 모험을 논하는 연구라면 반드시 '믿음'부터 다루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려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중에 믿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증명할 수 없을 때, 그는 믿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도를 통해 믿음의 놀라운 특권을 주장한다. 믿음의 무한한 유산遺産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기도이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의 영역에서 똑같이 진실하고 꾸준하게 인내함으로써 진정한 경건을 쌓아나간다. 그러나 기도를 중단한 믿음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고,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믿음의 능력에는 한계와 제한이 없다! 우리의 마음에서 의심을 몰아내고 불신앙을 추방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음 있는 자에게 허락하신다.


기도는 믿음을 하나님께 비추고 하나님을 세상에 비춘다. 산을 옮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인데, 그분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과 기도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 하실 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그런 다음 주님은 우리가 믿음과 기도를 통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 물론 이 능력은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 살리는 능력이요, 파괴하는 능력이 아니라 복을 주는 능력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미심장한 말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믿음과 기도의 문의 쐐기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 24)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라는 이 말씀을 깊이깊이 묵상하라! 이것은 깨닫고 자기 것으로 취하는 적극적으로 쓰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요, 그분과의 교제를 체험하는 것이요, 확신을 현실로 바꾸는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믿음이 자라거나 아니면 쇠할 수 있는가? 죄악이 넘치고 사랑이 식어가는 오늘날, 믿음이 굳게 설 수 있는가? 종교가 단순히 형식으로 변하고 세속성이 점점 강해지는 상황에서 믿음이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까? 주님은 "인자人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이 예상보다 일찍 오실 것에 대비하여 믿음의 등燈을 손질하고, 그 등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관리해야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기초이며, 영혼의 안전을 확보하는 원칙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내다 보시고 그 점에 대해 경고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눅 22:31, 32)


이 말씀에는 지극히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다. 주님이 지키기를 원하셨던 것은 바로 베드로의 믿음이었다. 그분은 믿음이 떨어지면 영적 생명도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모든 구조물이 무너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를 받아야 했던 것은 바로 베드로의 믿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의 영혼을 염려하시고, 언제나 응답 받는 기분의 기도를 통해 그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시기를 원하셨다.


이런 깊은 진리가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에 담겨 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안전장치요 열매 맺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5-7)




손기철 / 고맙습니다 성령님

오늘의 책 2014. 3. 28. 10:14 Posted by 따시쿵

손기철


모든 믿는 사람들이 말씀과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하나님나라를 넓혀가는 왕 같은 제사장이자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도록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성경의 방법대로, 우리가 문제에 봉착할 때에 특별한 사람을 찾지 않더라도 자신이 성령님의 임재 하에 주(主)의 말씀을 믿고 선포함으로써,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는 하늘 권세자로 서는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는 조지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농무성의 ‘러셀 리서치 센터’에서 ‘박사 후 과정’(post-doc.)을 밟았다. 1990년부터 건국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생명환경과학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며,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 대표이다. 또 한국창조과학회 이사이자 온누리교회 장로이다. 저서로는 『왕의 기도』, 『왕의 기도 DVD북』, 『고맙습니다 성령님』(규장),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두란노)『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나라』,『알고 싶어요 하나님의 의』등이 있다.




선포기도의 권리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고,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실 때 선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눅 5:13)


아버지의 아들 자격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소서"라는 간구기도를 드렸지만, 다른 사람이나 악한 영을 향해서는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선포기도를 했습니다.


베르도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행 3:6)


지금 우리는 대부분 간구하는 기도만을 사용합니다. 선포하는 기도는 신앙 생활에서 쏙 빠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선포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닏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포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만큼 예수님과 가까웠고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님과 예수님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곧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6:17)


그러므로 성령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살 때,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동기가 예수님이 주신 선한 것이라면, 선포기도는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선포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보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민과 근심이 있을 때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라고 선포하는 것은, 결국 마음속 고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너보다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아느냐? 예수님이 피값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으니, 너희는 내게 아무런 영향력과 권세가 없다. 내 안에서 떠나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포기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다보니, 대상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말합니다. 대상을 앞에 놓고도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큰일 났어요. 이거 빨리 해주셔야 해요. 아버지, 나 이거 못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간구기도를 하지 않고도 바로 선포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


나에겐 아들 셋, 딸 하나, 네 명의 자녀가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들이다. 아들 둘은 내가 낳았고, 나머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하나님이 거저 선물로 주셨다.


1989년 어느 봄날, 우리 교회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러 왔다.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예배 시간이어서 들어왔다고 했다. 아이들에 비해서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버지는 언뜻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교회에 왔다. 예배만 드리고 갈 뿐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철이 바뀌어도 그들의 옷은 바뀌지 않았다. 그 아버지는 두 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인 것처럼 언제나 양손에 꼭 붙들고 있었고,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윽한 눈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해 여름 7월 31일은 가장 무더운 날이었다. 오후 3시쯤엔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 그 시간에 울면서 다급하게 말하는 한 소년의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우리 아빠가 숨을 안 쉬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나니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날 뿐이었다. "밖에 나가 누구든지 어른을 붙들고 부탁해라. 우선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셔야 한다. 내가 곧장 그 곳으로 갈게. 그 곳이 어디니?" 나는 비로소 그 곳이 성남인 것을 알았다. 우리 교회는 종로 5가에 있으니 바삐 더나도 언제쯤에나 도착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몇 번 우리 교회에 나왔던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2학년인 어린 딸아이를 이 세상에 남겨 두고......


빈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먼 친척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혹시 왔다가 이 아이들을 떠맡게 될까 봐 안 오는 것 같았다. 빈소를 지키며 나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 아버지는 깊이 병든 몸으로 왜 성남에서 종로 5가에 있는 우리 교회까지 먼 곳으로 와서 예배를 드렸을까? 무엇을 하나님께 기도했을까? 아마도 저 아이들을 부탁하지 않았을까? 병든 아버지의 기도 부탁을 듣고 하나님은 부지런히 찾으셨으리라. 그 아이들을 잘 길러 줄 새로운 부모를......


아! 그 후보 주에 내가 뽑힌 게 아닐까?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를 그렇게 착하게 여기셨다니..... 우리 부부를 그렇게 믿으셨다니...... 나는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남편도 나의 등을 두드려 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벽제에 매장해 주고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 아이는 우리 큰애보다 나이가 많아서 우리 집의 장남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엔 아들, 아들, 딸, 아들, 이렇게 네 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그 날부터 19평짜리 우리 아파트엔 여섯 명이 복닥되기 시작했다. 방 하나엔 아들 셋이, 작은 방에 딸 아이가, 우리 부부는 부엌 겸 거실에서 살았다. 아침이면 하나뿐인 화장실 겸  세면실에 길다란 줄이 섰다.


나는 모든 것에 서툴고 잘 해낼 수 없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나를 믿고 나에게 이 아이들을 서슴없이 맡기신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하늘나라에 가 있는 아이들의 아버지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 아들은 학원 한 번, 과외 한 번 시켜 주지 못하고 참고서 몇 권만 사 주었을 뿐인데 단번에 외대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해서 우리 부부를 기쁘게 해 주었다. 이젠 다 커서 너무 멋지고 잘생기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다. 딸아이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게 자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딸아이가 아빠를 빼어 닮아 미인이라고 칭찬이다.


나는 지금도 누가 "자녀가 몇이세요?"라고 물으면 "아들 셋, 딸 하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그 말에 "와! 요즘 세상에 무식하게 넷이나 낳았대"하는 소리가 이어질 것을 알지만 말이다. 나는 어버이날에 네 개의 카네이션을 하루 종일 가슴에 달고 다닌다. 그러면 여지없이 "젊은 여자가 촌스럽게 저게 뭐야"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나는 "그래! 난 촌스러워. 촌스러워도 나는 좋아! 카네이션 네 개나 받을 수 있는 엄마 또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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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 그 사람을 가졌는가

좋은 글귀 2014. 2. 28. 14:07 Posted by 따시쿵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수평선 너머」(한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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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 토저 / 이것이 성령님이다

오늘의 책 2014. 1. 29. 09:14 Posted by 따시쿵

에이든 토저, Aiden Wilson Tozer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목사이자 저술가였다. 18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버그에서 태어났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1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 교회에서 44년간 목회를 했고, 그 중 31년을 시카고의 '남부 동맹 교회'에서 시무했다.

 

경건시와 신비주의적인 찬송, 에머슨과 셰익스피어의 글을 좋아한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풍성하고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절충하여 타협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이나 십자가 없는 성공 처세술을 전하는 것은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나님을 추구함』,『경건 생활의 기초』,『패배를 통한 승리』,『하나님을 바로 알자』『거듭난 자의 생활』,『경건 생활의 기초』,『경건 생활의 비결』,『예수 방향으로 가라』등이 있다.

 

 

 

세상과 연합하지 마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요 14:17)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기독교는 교회와 세상이 서로 완전히 반대일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갈급한 심령에게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상반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을 메워보려고 이 둘 사이에 비성경적(非聖經的) 이고 불밥적인 결합을 성사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실상 불가능하다. 세상과 연합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가련한 잡종(雜種)에 불과하다. 이것은 주께 가증한 것이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오늘날 이도 저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의 교훈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명확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독교가 세상과 너무나 뒤엉켜버렸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신약성경의 교훈에서 근본적으로 떠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신자인 체하는 소경들은 회칠한 세상을 보고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며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쓴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 세상은 서로 양보하며 사이좋게 지낸다. 그렇지만 세상은 속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경멸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 명부(名簿)에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적이다. 아무리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나서서 애를 쓴다 해도 육(肉)이 영적(靈的)인 것으로 바뀔 수는 없다. 학습문답, 세례, 성찬 그리고 신앙고백 같은 것들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아담의 자손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것이 아니요, 육이 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라고 말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또한 로마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서로 다른 영에 속한 사람들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삶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 '끔찍한 회색지대'를 말끔히 제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성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과 신자의 관계에 대해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름대로 성실하지만 아직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께 조언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6,7)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세상과 동일시하셨으며, 자신과 그들이 '서로 다른 두 영(靈)들'에 속했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곧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분으로 사분오열된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담의 장막 집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충성을 다한다. 아담의 장막을 무너뜨리려면 외부로부터 이질적인 것이 침투해야 한다. 이 이질적인 것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 19)

 

E. M. 바운즈 / 응답기도

오늘의 책 2014. 1. 29. 09:11 Posted by 따시쿵

Edward McKendree Bounds

1835년 8월15일 미주리주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법정 일을 해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살이 되기 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24살 때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갑작스럽게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고,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첫 설교는 몬티첼로라는 인근 마을의 조그만 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1894년 내쉬빌에서 은퇴하기까지 감리교 목사로 사역하였다. 은퇴 후에는 집필, 순회부흥 사역에 힘쓰며 기도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 중 『기도의 능력』과 『부활』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간되었고, 다른 책들은 그가 죽고 난 후 바운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호머 핫지가 바운즈의 친구인 클로드 칠턴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이렇게 출간된 저서들은 1913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선지자'로 불리우는 이유이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기도의 용사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도 대선배하고 할 수 있다. 면류관과 옥좌와 홀(笏)이 그의 것이다. 그의 옷은 희며 불꽃으로 타오른다. 엘리야는 강력한 기도와 뜨거운 열정을 가진 초인(超人)으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가 우리와 성정(性精)이 같은 사람이라고 잘라 말한다(약 5:17). 신약은 결코 그를 초인이하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놀라은 기도의 능력을 보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분발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우리 시대에 절실이 요구되는 것은 엘리야처럼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이다.

 

엘리야는 기도의 교훈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이름이 성경에 오르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도학교'를 졸업했다. 산이나 광야의 은밀한 곳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중보기도에 전념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타락시키는 아합 왕의 우상숭배를 멸하기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꼐서는 그의 기도에 확실히 응답하셨다. 그리고 그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우상 신(神)에게 복수할 것에 대해 의논했다. 그는 그의 시대, 즉 복수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중보기도의 용사 엘리야는 사람과 긍휼의 상징인 감람나무가지를 두르는 것이 아니라, 공의와 진노의 상징인 불을 둘러야 했다. 확신과 거룩한 담대함으로 충만한 엘리야는 놀라고 겁먹은 아합 왕에게 뜨거운 기도를 통해 받은 두려운 메시지를 전했다(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는 아합 왕에세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雨露)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라고 선포했다.

 

 

강력한 기도

 

"나의 섬기는(Before whom I stand)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엘리야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기도할 수 있었던 비결을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이 말과 유사한 표현이 천사장 가브리엘의 말에서 발견되는데, 가브리엘은 제사장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눅 1:19)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열정, 헌신, 담대함 그리고 순종의 의지(意志)에 있어서 가브리엘은 엘리야보다 조금 더 강했다.

 

엘리야는 놀라운 기도응답을 받았다! 그의 기도에는 지속적인 능력이 있었다! 성경은 "저[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약 5:17) 라고 말한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또 그 예언을 실현시킬 수 있었는가? 그의 기도는 전시효과(展示效果)를 노린 쇼나 속임수가 아니었고, 열의나 활기가 없는 공식적인 기도도 아니었다.

 

엘리야가 엘리야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의 전인(全人)은 열정과 간절함을 불어넣어 끊임없이 기도했다. 엘리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실재를 확실히 느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능력이 이 땅 위에 직접 임하도록 만드는 수단이었다. 이런 그의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났고 더렵혀진 그의 이름과 꺠어진 율법이 회복되었으며 그분의 종들의 명예가 되살아났다.

 

영문(英文) 개정 표준역 성경(RSV)은 야고보서 5장 17절을 "저[엘리야]가 ... 간절히 기도한즉"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대신 "저가 ... 자신의 기도 속에서 기조한즉" 또는 "저가 ... 기도로써 기도한즉"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는 기도의 힘을 모두 하나로 합쳐서 기도했다는 말이다.

 

엘리야의 기도는 강력하고, 지속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약한 기도는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조정래 / 정글만리 1,2,3

오늘의 책 2013. 12. 28. 08:24 Posted by 따시쿵

조정래(趙廷來)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광주 서중학교를 거쳐 서울 보성고등학교 당시, 농촌 사회활동에 뜻이 있어 이과반에 적을 두고 있던 조정래는 3학년에 이르러 국문과로 진학 목표를 세우고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다. 이 무렵 같은 과 동기인 김초혜를 만난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단편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한, 그 그늘의 자리』, 중편 『유형의 땅』, 장편소설 『대장경』, 『불놀이』 『인간 연습』, 『사람의 탈』,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김구』, 『박태준』, 『세종대왕』, 『이순신』, 자전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 등을 출간하였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성옥문학상, 동국문학상, 단재문학상, 노신문학상, 광주문화예술상, 동리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조정래 작가의 작품은 영어 · 프랑스어 · 독일어 · 일본어 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번역 출간되었고(중국어 · 스웨덴어 번역 중), 영화와 만화로 만들어졌으며, TV 드라마와 뮤지컬로도 제작되고 있다.


『조정래 문학전집』의 1권 「대장경」에서부터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 민중에 대한 신뢰, 예술적 완성을 향한 집념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직접 체험을 소설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소설 원칙을 철회하는 것과 아울러 갑오농민전쟁과 3.1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 항쟁의 역사를 대하소설로 풀어낼 계획을 세우고 「태백산맥」집필 준비에 들어간다. 


고초 끝에 1만 6천 5백장 분량으로 6년간 연재된 태백산맥은 좌익운동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파헤치며 우리 민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뤄 젊은 세대의 공감과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태백산맥은 완간 되자마자 문학담당기자와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1980년대 최고의 작품’, ‘1980년대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태백산맥을 마치고 다시 1년쯤의 취재와 자료 정리기간을 거쳐 1990년 12월 아리랑 집필에 착수하고 1995년 7월에 2만장 분량의 원고를 탈고한다. 아리랑은 일제의 식민지배체제에서 왜곡된 민족의식을 바로 세우려는 작가의 집념이 서려 있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사 3부작의 말미를 장식하는 대하소설 「한강」을 마치고 ‘20년 글감옥’ 에서 출옥했다. 한강은 현대한국사회의 풍경화를 그려나간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은 전 32권 5만3천여장의 원고지에 높이가 5m 50㎝에 이르며 그간 조정래의 책은 1000만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그의 대하소설『태백산맥』은 원고지 1만 6천 5백장의 방대한 분량 속에서 60명이 넘는 주인공들이 등장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남기는 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다. 그 동안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곡되어왔던 해방직후의 역사적 진실을 현미경 들이대듯 파헤치고 있으면서도 작품 전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은 식민지시대를 깊은 역사 인식으로 탐구한 대하소설로 김제 출신의 인물들이 군산, 하와이, 동경, 만주,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옮겨서 40여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제시대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부각 시키고 있어 민족적 긍지와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케 하는 역작이다. 


『한강』은 1959년 이후의 한국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없이 세밀한 현미경의 시선과 한 번에 굽어보는 망원경의 시선이 교차하는 조정래 문학의 완결판이다. 4.19, 5.16, 10월 유신과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격동의 세월을 10권의 책으로 묶었다. 저술에 들어가면 어느 작가보다도 근면하고 규칙적으로 원고지를 채워나간다는 작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 /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의 책 2013. 12. 26. 09:12 Posted by 따시쿵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토마스 아 켐피스는 평생 복음서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여(히 3:1)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빌 2:5)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막 8:34) 삶을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갈 2:20)라는 은혜의 신분에서 늘 떠나지 않는 묵상의 삶,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그의 글은 십자가의 교리는 있지만 십자가의 삶은 살지 않는 우리에게 회개의 경종과 믿음생활의 지침이 될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회심에 대한 강조, 십자가 중심성, 다른 어떤 인간 중보자 없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점 등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의 맹아(萌芽) 역할을 하였다.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에 관해


☞ 주님


나의 자녀야, 이 세상에서는 시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네게는 언제나 영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기회만 있으면 공격해 오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욥 7:1).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상처를 입지 않을 재간이 없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 영적 전쟁의 군사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런즉 너는 용감해야 한다! 승리는 가치가 있지만 패배에는 괴로움과 고통만이 따른다.


만약 네가 이 세상에서 안식을 구한다면 어떻게 영원한 하늘의 안식을 누릴 수 있겠느냐? 충분한 안식이 아니라 강력한 인내를 구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서 구해야 한다. 평화는 사람이나 그 어던 피조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할 뿐이다.


나에 대한 사랑에 힘입어 모든 것을 기쁘게 견뎌라. 바로 노동, 고통, 시험, 억울함, 불안, 궁핍, 질병, 비방, 중상, 비난, 굴욕, 혼란, 징계 그리고 멸시 등이다. 그것들은 특히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시험이겠지만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놀라운 것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너는 단순한 노력만으로도 영원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또 어려움을 견디는 것으로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가 영적 위로를 누릴 수 있겠느야? 그렇지 않다.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들까지도 문제, 시험, 그리고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면서 자신들보다 나를 신뢰하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롬 8:18).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많은 눈물과 엄청난 영적 수고를 치르고 얻은 것을 단숨에 얻기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인내하면서 나를 기다려야 한다.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라. 용기를 내라. 고난이나 두려움 때문에 나를 섬기지 마라. 나의 영광을 위해 네 자신의 생명을 바쳐라. 내가 보상하겠고, 또 어려움을 겪을 때 너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시 91:4).



인간의 헛된 판단에 관해


☞ 주님

 

나의 자녀야, 네 마음을 하나님께 단단히 맡겨라. 네 양심이 거룩함과 흠 없음을 입증할 때는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은 선하고 행복한 일이다. 마음이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귀 기울이지 마라.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했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고전 9:22)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판단을 받아야 할 정도의 일은 거의 없었다(고전 4:3). 바울은 있는 힘과 재능을 다해 다른 사람들의 구원과 전도에 힘썼다(골 1:29).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받기도 했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전부를 맡겼다. 부당한 말을 하고, 헛된 것과 거짓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들과 마주할지라도 겸손과 인내로써 응대했다. 마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침묵하는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대꾸할 때도 있었다(행 26장, 빌 1:14).

 

언젠가는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사 51:12) 인간은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사라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너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는 너보다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고, 하남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롬 2:3).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채 사람들의 시비에 응대하지 마라. 당장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 같고, 부당하게 수치를 겪는 것 같은지라도 속상해 하지 말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라(딤후 2:14). 오히려 온갖 부끄러움과 잘못된 것으로부터 구원하고, 각자의 행위에 따라 갚아줄 수 있는 하늘에 있는 나를 바라보라(마 16:27, 롬 2:6)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한 포기에 관해


☞ 주님

 

나의 자녀야, 자신을 포기하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 24). 스스로를 위해 선택하거나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면 언제나 얻을 수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으면 훨씬 더 큰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 따르는 자

 

주여, 얼마나 자주 포기해야 합니까?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 주님

 

언제나, 매 순간마다 그래야 한다. 큰 것은 물론이고 작은 것까지 한꺼번에 포기해야 한다. 나는 어떤 것도 예외로 인정하지 않으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안팎으로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네가 내게 속하고, 내가 네게 속할 수 있겠느냐? 빨리 포기할수록 내게 더 큰 기쁨을 안겨주기에 너는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하면서 몇 가지 예외를 두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기에 스스로를 돌볼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바치지만 나중에 시험이 닥치면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 전혀 덕도 쌓지 못하고,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매일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는다면 투명한 마음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할뿐 아니라 나와 친밀한 교제도 나누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열매 맺는 진정한 결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자주 하던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네 자신을 내려놓으면, 진정한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모두를 위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라.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되돌려 받을 생각도 마라. 흔들림 없이 순수하게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네 마음이 자유로우면 어둠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시 139:11). 이 일에 힘쓰라. 이 일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바람으로 삼으면 모든 이기심을 벗어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나를 따르면서 자신을 죽이고 나와 함께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리하면 모든 헛된 상상과 악한 근심과 쓸모없는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지나친 두려움은 물러가고 무절제한 사랑 역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처신에 관해


☞ 주님

 

나의 자녀야, 네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매우 부지런히 힘써 내적으로 자유롭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모든 일을 네가 주도해야 하며, 그것들에 눌리게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네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결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너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몫과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물질을 의지하고 살아가면서도 영원한 것들을 묵상한다. 한쪽으로는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또 한쪽으로는 하늘의 것들을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들이 전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위대한 창조주가 결정하시는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창조물의 질서를 바로 잡는다.

 

어떤 경우에든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육신의 눈과 귀로 사물을 살피거나 듣지 않고, 모세처럼 주님께 지혜를 구하러 장막 안으로 들어가면(출 33:9)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닥치게 될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한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의심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늘 장막을 이용했고, 위험한 일과 사람들의 잘못을 접할 때마다 기도를 통해 도움을 구했다. 그런즉 너도 이처럼 마음으리 골방으로 들어가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마 6:6).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묻지 않아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았다(수 9:14). 달콤한 말을 너무 쉽게 믿은 나머지 거짓된 행동을 의심하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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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 굽이 돌아가는 길

좋은 글귀 2013. 12. 26. 09:08 Posted by 따시쿵




굽이 돌아가는 길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바른 길보다는

산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은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은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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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 / 춤추시는 하나님

오늘의 책 2013. 12. 1. 21:50 Posted by 따시쿵

헨리 나우웬 (Henri J. M. Nouwen)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제이자 존경받는 교수이며 사랑받는 목회자로 영적 삶에 관한 40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책은 22개가 넘는 언어로 출간되어 2백만 부 이상 팔릴 만큼 많은 이들에게 영적 길잡이가 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로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이들은 줄지 않고 있다. 그는'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맑고 따뜻한 시각으로 풀어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32년 네덜란드 네이께르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6년간 심리학을 공부했다. 이후 미국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연구한 그는 30대에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헨리 나우웬의 삶의 행보는 1981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그 무렵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거룩한 부담감을 품고 페루의 빈민가로 떠나 민중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이후 강단으로 돌아온 그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했고, 1986년에 정신지체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라는 새로운 부르심에 순종하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소천하기까지 그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이에게 주는 선물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따로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을 자주 본다. 어스름한 새벽에 가실 때도 있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늘 아버지임을 거듭 확인하신다. 예수님께 할 말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사역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더 큰 가능성에 응답할 수 있으며, 명령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정체를 좌우할 것 같던 다른 질문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며 내 적은 누구인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할 때 우리의 정체감은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인 관계의 포로노릇을 그치게 된다.


기도는 우리에게 대인 관계가 우상이 되지 않게 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을 배우는 까닭은 , 오직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맛보았거나 느꼈기 때문임을 기도는 일깨워 준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이 말씀 속에 대인 관계를 초월하는 사랑의 길이 있다. 먼저 주신 그 사랑을 입었기에 우리는 자유롭다. 그 사랑이 우리를 소외와 분리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래를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척하며 모든 것을 쌓아 두려는 강박 관념을 녹이는 사랑이다. 타인을 사랑할 능력을 주는 사랑이다.


기도는 세상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로 여기는 태도다. 기도하면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얘기를 그치지 않게 된다. 기도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야 한다는 집착에서 비롯되는 고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준다. 마음을 열고 고난을 받아들이게 해 준다. 기도는 삶이라는 선물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계시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롭게 기억하도록 해 준다.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험에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그분의 일을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생각과 가슴을 열고 깊은 바다와 높은 하늘로 손을 뻗는 법을 배운다. 여러 면에서 기도는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다. 언제나 주시는 선물에 마음을 여는 태도다. 우리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게 할 용기를 얻는다. 그 일은 비록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이제는 그다지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외모든, 타인에게 받은 소외든, 상처나 학대받은 기억이든, 타인의 손에 당한 압제든 우리는 인간의 그런 한계와 상처에 직면할  용기도 바로 기도를 통해 얻는다. 꺼리낌 없이 자신의 고민을 놓고 부르짖거나 타인의 고난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자신이 서서히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내 힘으로 창조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부분은 잠잠히 기다리는 습성이 생긴다. 기쁨이란 풍선과 파티의 문제도 아니고, 내 집 마련이나 자녀의 뛰어난 성적 문제도 아님을 깨닫는다. 기쁨은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는 것과 상관 있다. 조용히 듣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이 너를 좋아하든 말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네 안에 사는 것처럼 너도 내 안에 살아라."